나이 든다는 건
예약해 두었던 패키지여행이 출발 열흘 전에 갑자기 취소됐다. “보홀 가면 해양레저 말고는 할 게 없을 텐데, 너 물에 안 들어가잖아.” 계획했던 여행이 무산되면서 급히 고른 보홀 패키지상품을 보며 남편이 말했다. 필리핀 보홀이라는 지역이 목적이 아니라, 여행 자체가 목적이었으니까. 일정표를 받아 보니 첫 이틀은 온통 해양레저라 망설여졌다.
‘물에 한 번 들어가 볼까? 수영복을 사야 하나?’
예전에 갔던 휴양지에서 모래밭에 누워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더 나이 들기 전에 좀 적극적으로 놀아보자고 했지만, 아무래도 물에 들어가는 건 타협이 안 됐다. 그냥 해변에서 놀자며 결국 보홀을 선택했다. 그래도 마지막 날에는 원숭이도 보고 시내 구경도 한다니 그걸로 위안 삼으면서. 알로나 비치의 하얀 모래와 매끈하게 자란 키 큰 야자수, 그 너머의 바다가 너무 좋아 매일이 두근거렸다. 깜깜한 밤을 지나 보란 듯이 나온 예쁜 아침이 여행 내내 기다려졌다. 얼른 일어나 그 아침을 보고 싶었다.
여행 첫날, 아름다운 해변의 선베드에 누워 보내는 게으른 시간을 상상하며 남편에게는 다이빙을 하라고 권했다. 남편이 귀찮다며 망설이는 걸 더 나이 들기 전에 물에서 놀라며 등을 떠밀었다. 아이들이 큰 후에는 남편도 물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우리를 데리러 온 트럭이 호텔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패키지여행에서는 항상 쾌적한 전용차를 타고 다녔는데 이번엔 트럭 짐칸 같은 곳에 앉으라고 해서 당황했다. 더군다나 돼지 농장을 청소하다 온 듯한 느낌의 트럭이었다. 여행 내내 우리는 트럭을 타고 다녔는데 어떨 때는 상태가 좀 좋은 트럭이었고 어떨 때는 먼지가 잔뜩 쌓인 덜덜거리는 트럭이 왔다. 주로 물놀이 일정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았다.
다이빙하러 가기 전, 간단히 호흡기 사용법을 알려주고 영상을 보여줬다. 갈 때까지만 해도 ‘할까, 말까’ 망설이던 남편은 산소통을 등에 메고 물에 들어가서 물속의 생물들을 보는 영상을 보더니 눈을 반짝였다. 반면 망설이던 나는 산소통을 메고 입에 산소호수를 물어야 한다는 걸 알고 기겁해서 안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교습소에 딸린 작은 수영장에서 호흡을 연습한 후, 배를 타고 다이빙하러 나간다고 했다. 수영장 앞에는 작은 바도 있었고 몇 걸음 더 가면 하얀 모래 해변이 펼쳐져 있었다. 다이빙체험하는 동안 나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겠노라며 책도 몇 권 가지고 간 터였다.
가이드는 다이빙을 안 하더라도 남편이랑 같이 가라고 했다. 잠깐 고민하다가 그냥 남겠다고 했더니, “바다도 아주 맑고 물속에 안 들어가도 물고기를 볼 수 있다”며 꼬드겼다. 아무래도 내가 혼자 남는 게 신경 쓰였나 보았다. ‘그럼 가서 물고기라도 볼까?’ 어떤 곳인지 궁금한 마음도 들어 같이 배를 탔다. 작은 통통배를 타고 조금 가니 다이빙하도록 준비된 큰 배가 있었다. 산소마스크는 얼굴을 전부 가리는 마스크와 눈만 가리는 마스크 중에 선택하는데, 자신 없는 사람은 풀페이스 마스크를 권했다. 남편이 일반 마스크를 선택하니 가이드가 “역시”하며 엄지를 들었다. ‘음, 내 남편 자신감 넘치네.’ 가만히 보니 다들 풀마스크를 선택했다. “남편, 너만 일반 마스크야” “엥? 가이드님, 저도 풀마스크로 할게요.” 가이드가 뭐라고 속닥거렸고 남편이 웃으며 그냥 한다고 했다. 나중에 물어보니 풀마스크는 사진이 잘 안 나온다고 했단다. “그런 말에 넘어가다니 너도 참” 가벼운 레저로 생각했는데 설명을 듣다 보니 걱정이 되었다. 깊은 바다라 주의사항이 많았고 심장에 무리가 올 수도 있고 다른 위험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고 한다.
“남편, 숨 잘 쉬어야 해, 꼭 무사히 돌아와야 해.”
수영을 못 해도 현지 가이드들이 뒤에서 잡아주고 안전하게 챙겨 준다고 했지만, 물에 빠질 염려보다는 호흡이나 심장에 무리 오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남편이 물에 들어가고 나 혼자 남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작은 물고기 무리가 물속에서 헤엄쳐 다녔다. 물고기도 바다도 투명했다. 휴양지의 아름다움과 여유가 느껴지는 경치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배 위에서 책을 펼치려니 괜히 민망해 폰을 만지작거렸다. 물고기도 찍어 보고 남편 잘하고 있겠지 하며 물속에 있는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사람도 찍어봤다. 나이가 든다는 건 그런 거였다. 물속에 들어가기 전에 하는 뻔한 안전교육에도 ‘혹시나’ 하고 염려하게 되는 것. 젊을 때는 귀담아듣지 않았을 이야기를 실제로 심장이 무사하기를 걱정하며 듣게 되는 것. 해변에 누워서 보내는 나만의 낭만을 상상했는데 어쩌다 이상한 배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어처구니없었지만 남들이 하는 잠수를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남편이
“무사히 나왔어.”
하며 웃었다.
잠시였지만 반가워서 엄지 척해줬다.
“어땠어?”
“나 산소통 메고 바다에 들어가는 거, 한 번 해 보고 싶었거든. 직접 해 보니까 너무 좋아.”
“근데 왜 망설였어?”
“다이빙이라고 해서 어릴 때 물놀이 할 때 했던 그런 건 줄 알았어.”
“뭐 봤어?”
“작은 물고기 떼, 자리돔 같은 물고기, 열대어, 본 건 별거 아닌데 좋았어.”
작은 물고기 떼는 나도 봤다. 바닷속에 예쁜 산호들이 있었을 텐데 남편에게는 산소통을 멘 경험만 중요했다. 그래도 뭐든 해 봐야 안다. 남편, 너라도 좋으니 됐다. 나는 한 것 없이 몸만 지쳤지만 너의 행복은 곧 나의 행복이니.
작은 통통배가 해안가에 도착했다. 갈 때도 물에 다 젖으며 건넜는데 남편을 챙겨주던 여자 가이드가 갑자기 “언니는 남편분이 업어줘야겠어요” 하며 눈을 찡긋했다. 남편이 당황하며 “자, 업혀” 하길래 얼씨구나 업혔다. “너 진짜….” ‘살 빼야겠어’라고 말하고 싶었겠지. 모래밭까지 거리는 제법 길었다. 가이드의 "제가 말 잘했죠?"라는 물음에 나는 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트럭을 타려다 폰이 없어진 걸 알았다. 남편 등에 업히면서 바다에 떨어진 듯했다. ‘바보같이 업혀서 뭐 하려고, 바꾼 지 얼마 안 됐는데, 사진 많이 찍고 가야 하는데, 오늘 여행 첫날인데’ 등등 생각이 연달아 들었다. 배에 있던 현지인이 고맙게도 물속에서 폰을 찾아주었다.
폰은 다행히 멀쩡했다. “카메라만 안돼.” 내 말에 남편이 폰을 보더니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바닷물을 닦는다고 벗겼던 커버를 반대로 씌워서 카메라가 가려져 있었다. 종종 있는 일이다. 할 수 없다. 오십 년을 그렇게 살았는데 뭘. 사람 쉽게 안 바뀐다니 그냥 사는 수밖에. 트럭을 타고 짐짝처럼 덜컹거리며 호텔로 돌아왔다. 고작 몇 시간 배에 앉아만 있었는데 힘들었다. 겨우 다이빙 하나 구경하고는 남은 일정이 걱정됐다. 다행히 그날은 다른 일정이 없었다. ‘내일은 그냥 호텔에 남는다고 할까?’ 바다는 역시 그냥 바라보는 게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