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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노 좀 젓네

by 여름햇살

쇠소깍은 서귀포 효돈천이 바다와 맞닿는 하구 계곡이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짙푸른 계곡을 바라보니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제주시에서 한 시간 가까이 차를 타고 쇠소깍에 간 적이 있다. 그때 우리는 계단에 서서 아래를 보며 "여기가 쇠소깍이야" 말한 뒤 입구 매점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돌아왔다. 남편은 내가 말하면 마지못해 가긴 하는데 막상 가면 깃발관광 가이드처럼 사진 한 장 찍어주고 얼른 돌아오려고 한다. 아이들 키우며 지칠 때는 나도 피곤해서 못 이기는 척 슬쩍 동의하기도 했다. 이제 나이가 드니 하나라도 더 보고 경험하고 싶어진다. 이날도 쇠소깍 가자는 말에 남편이 "갔었잖아 "하는 걸 "테우도 타고 카약도 탈 거야" 하며 꼭 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

남편은 똑같은 데서 뭐 하러 두 번 타냐며 카약만 타자고 했다. 비체올린에서 눈썰매 같은 조악한 카약을 타며 고생 좀 한 나는 테우를 타겠다고 고집부렸다. "테우를 왜 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할 텐데." "그럼 카약은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뭐 하는데?" "카약은 노라도 젓지." "난 노 안 젓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고 싶어." 남편이 마지못해 테우표를 달라고 했다. 우리가 매표를 해야 하는 줄도 모르고 왔다 갔다 하며 '타네 안 타네' 하는 동안 그 시간에 탈 수 있는 테우는 인원이 다 차서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했다.

구명조끼를 하나씩 받고 카약을 타러 내려갔다. 나무로 만들어진 노란 카약은 제법 넓고 단단해 보였다. 원래는 플라스틱이었는데 바위에 자꾸 부딪혀 나무로 바꿨다고 한다. 갈색 카약도 있었는데 마치 고무통처럼 보여 우리가 탄 노란 카약이 맘에 들었다. 고무통은 아무래도 좀. 카약을 타고 천천히 나아갔다. 마주 보고 앉아 한 사람만 노를 저을 수 있고 중간에 바꿀 수는 없다. 남편은 아주 열심히 노를 젓는 듯하더니 조금 있다 카약 이용시간이 20분이라며이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안쪽으로는 가 보지도 않았는데 이상해서 시간을 보니 겨우 5분이 지나 있었다. "카페도 아니고 여기서도 가만히 못 앉아있겠어?" 어이가 없었다.

다시 노를 저었다. 안쪽 계곡에 물안개가 피어올라 곧 선녀라도 나올 것처럼 신비롭게 보였다. 카약을 타지 않으면 볼 수 없는 풍경을 하마터면 못 보고 갈 뻔했다. 다른 배에서 아줌마가 불만인 듯 타박하는 소리가 이 쪽까지 들렸다. 착하게 생긴 아저씨가 혼나는 아이 같은 표정으로 아무 말도 못 하고 서투르게 노를 젓고 있었다. 노도 안 젓고 거저먹는 아줌마가 화를 내는 건 아무래도 주객이 전도된 상황으로 보였다. 아저씨는 카약을 처음 탔을지도 모르는데 불쌍한 마음이 들며 내 남편이 노는 잘 젓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시간만 묻던 남편이 카약에 재미가 들었는지 경주해도 되겠다며 장난스럽게 아주 열심히 젓는 걸 보니 웃음도 났다. 혼자도 참 잘 논다. 남이 노 젓는 걸 보며 "노를 거꾸로 젓고 있네" 하며 혼자 훈수도 뒀다. 남편은 말이 없고 무뚝뚝한 편인데 종종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을 갖고 엉뚱한 행동을 해 딸들에게 "무슨 50살 아저씨가 그래?"라는 말을 듣곤 한다. 물안개 가까이 가자 어느 바위아래 고무보트에 있던 안내원이 더 이상 가면 안 되고 돌아가라고 했다. 거기까지 갔다가 돌아가는 건데 가만히 못 있는 남편은 그전에 두 번이나 돌아가려 한 것이다. 뭐 어쨌든 계속 노를 저었으니 불만은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 우리 애들 또래로 보이는 여자아이 둘이 노를 못 저어서 갈팡질팡 하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눈을 못 떼고 걱정하며 보는 사람은 엄마 아빠겠지. 엄마가 자꾸 일어날 것처럼 들썩거리며 뭐라고 말을 했다. 우리 딸들 생각이 났다. 부모라서 별로 위험한 상황이 아닌데도 걱정하게 되나 보다. 어느 배에서는 젊은 남자 둘이 탔는데 가만히 앉아 있는 친구는 입이라도 다물지 "나 빠지기 싫다. 에이 그렇게 하면 어떡하냐"하며 툴툴거리는 게 꼴 보기 싫었다. 노를 젓는 쪽은 화가 난 것 같았다. 아무래도 노를 두 개 준비하라고 말해줘야 할 것 같았다.


"이제 테우 타자" 남편의 반응을 궁금해하며 말했는데 별말 없이 테우표를 끊었다. 테우는 20명 정도 한 번에 모여서 탔는데 정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대신 자칭 선장이라 하는 직원이 재미있는 설명을 해준다. 현무암 절벽을 보며 곰 발바닥 모양도 곰 머리 모양도 뽀뽀바위도 알려줬고, 절벽 아래쪽 까만 부분까지는 물이 차는 곳이라는 설명도 했다. 바위에 붙어 있는 건 따개비가 아니고 굴인데 지하수와 바닷물이 만나는 곳이라 더 이상 자라지 않아 먹을 수는 없다고 한다. 연못 속에는 숭어도 민물장어도 광어도 있다고 해서 숭어를 볼 수 있을까 물속을 가만히 봤지만 내 눈에는 안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봤는지 "여기 있네"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선장이라는 직원은 비가 오면 테우를 운행하지 않는데 출근은 한다며 출근해도 일은 안 하고 돈은 버니까 날마다 비가 오라고 기도한다고 말했다. 나였어도 그런 기도를 할 것 같다. 바닷물과 용천수가 만나 1년 내내 18도라는 물 위에서 테우에 가만히 앉아 땀을 흘리며 보슬보슬 내리는 비를 맞았다. 남편 말대로 모르는 사람들과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 테우보다 노라도 젓는 카약이 낫긴 했다. 그래도 그 바위가 곰발바닥인지 개코원숭이인지는 중요하지 않지만 아무리 멋진 경치를 봐도 "우와" 하는 감탄사 한 번 밖에 못하는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듣는 게 뭐라도 얻은 것 같아서 좋다. 자유여행이 좀 더 다채로운 경험을 하지만 패키지여행에서는 가이드에게서 전설이나 지역의 특성을 들을 수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제주토박이라면서 생각보다 제주에서 안 가보고 안 해본 게 많다. 쇠소깍에서 체험하는 사람도 거의 외국인이거나 관광객이었다. 카약도 테우도 그다지 재미있지 않았고 구명조끼는 불편했지만 괜찮았다. 의외로 도민이 관광객들보다 명소도 맛집도 더 모르기도 한다. 남들은 오고 싶어 하는 제주에 사는 행운을 얻었으니 제주를 잘 누려보고 싶어졌다. 나이가 들면서 몸을 쓰는 일엔 주춤해지는데 다행히 남편은 활동적이니 지금이라도 함께 할 수 있는 경험을 하나씩 더해 보려 한다. "나 움직이는 거 싫어해"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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