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아상 Mar 22. 2024

식물과 회귀

식물은 반복하며 산다. 내년에 조금 커진다고 해도 똑같은 꽃과 잎사귀, 열매를 만든다. 수백 년 수천 년을 사는 식물도 매해 동일한 삶이다. 번식해도 같은 것을 만든다. 내가 아는 식물은 곧 어떤 잎사귀를 낼지, 어떤 꽃을 낼지 안다. 다 알면서도 키운다. 다 아는 것은 재미가 없다지만 식물은 알아도 키우는 재미가 있다.  

    


   

웹툰, 웹소설에서 ‘회귀’, ‘빙의’, ‘환생’은 최근 인기 소재다. 인생 다시 살기인데, 이전 생의 자아와 기억을 갖고, 과거나 타인의 몸으로 다시 사는 이야기다. ‘이망생(이번 생은 망했다)이라는 말이 청소년들 사이에서 유행했는데 그 말과도 연관된다. 이번 생은 포기하고 다음 생에서 다시 원하는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다.     

처음이라 삶은 어설프고, 막다른 상황에 빠진 것 같고 후회되는 일도 많다. 이럴 때 ‘리셋’하고 다시 살고 싶은 마음은 공감이 가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리셋’하고 싶은 욕구는 억누르고 현실에서 수정을 꾀할 수밖에 없다. 

회귀하지 않아도 현실에서 원치 않는 삶을 반복해서 사는 경우가 많다. 과거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비슷한 삶을 살 가능성은 크다는 말이다. 원하지 않으면서 현실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뿌린 씨앗이 무엇인지 모르고 같은 생각과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신의 삶을 후회하지만 대물림해서 자식에게 물려주는 경우도 원치 않는 반복을 하기는 마찬가지다.      

너무 잦은 ’리셋‘ 욕구는 통찰이나 경험치, 노력을 이용하기 어렵게 한다.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거의 선하나 긋고 망했다며 종이를 버리고 새 종이에 그리기를 반복하는 아이들이 있다. 새 종이를 여러 장 소모해도 크게 향상된 그림을 그리지는 못한다. 실패한 것을 고쳐가며 그림을 많이 완성해 본 아이들의 실력이 빨리 는다.      

웹 이야기에서 ’회귀‘는 통찰이나 노력, 경험치를 이용하기보다는 상대의 비밀을 알거나 마법 같은 힘 또는 천재가 되어, 자기 한(恨)풀이와 복수하는데 사용되는 것은 아쉽다.     




니체의 ’회귀‘ 사상은 특이하다.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다시 한번 살아야만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거기에 새로운 것이란 없으며, 모든 고통, 모든 쾌락, 모든 사유와 탄식, 네 삶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네게 다시 찾아올 것이다.”라는 전제하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너는 이 삶을 다시 한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는가?”

나는 솔직히 바꾸고 싶은 곳이 많다. 웹 이야기들에 나오듯 처음부터, 아니면 어느 순간부터 다시 살고 싶다. 꼭 지우고 싶은 부분도 많다. 

니체는 다소 위안이 되는 말을 하는데, <선악의 저편>에서 “판단의 오류를 포기하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이며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라며, 삶에서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실수에 대해 받아들이라고 한다.

“아득하고 낯선 천상의 행복과 은총과 은혜를 꿈꾸며 학수고대하지 말고,

다시 한번 더 살고 싶어 하며, 영원히 그렇게 살고 싶은 것처럼 그렇게 살 것!

우리의 사명은 매 순간 우리 가까이 다가온다.”

“그 누가 영원회귀 사유를 견뎌낼 것인가? 

”구원은 없다“는 명제로 인해 파멸할 수 있는 그런 자는 사멸해야 한다.”

니체는 무한히 반복하는 오류와 불행이 있는 삶이라 해도 기꺼이 사랑하며 살라고 한다. 자아란 극복해야 할 무엇이고, 그것을 극복한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회귀하는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자아를 극복할 것이다.

회귀를 통해 새 환경이나 마법, 천재성을 가지게 된다는 소망과는 좀 다른 이야기다.          

   



니체의 말처럼 반복되는 삶이, 수정하고 싶은 욕구나 원인과 결과를 모르는 무지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테드 창의 소설<당신 인생의 이야기>(영화: 컨택트)에서 언어학자인 여자 주인공은 외계인을 만나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 우리가 사용하는 일직 선적 언어가 아니라 한눈에 시작과 끝을 동시에 아는 언어다. 새로운 언어 습득은 사고도 바꿔서, 주인공은 시작과 끝을 보게 되고 미래를 알게 된다. 결혼하고 딸을 낳게 되는데 불행으로 끝나는 미래이다. 주인공은 불행한 결말을 알면서도 아는 미래를 기꺼이 반복한다. 

왜냐하면 소설에서 딸아이가 다 아는 동화책을 반복해서 읽고 싶어 하는 것처럼 주인공도 자기 이야기에 나오는 '순간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음식을 반복해서 먹고, 좋아하는 영화, 책을 반복하고 보고, 사랑하는 사람과 반복되는 삶을 살고 싶듯이 그렇게 삶의 순간들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다. 비록 아픔이 있다고 해도 다시 살고 싶은 삶.     

     



식물은 잎사귀나 열매를 잃고, 가지가 부러지거나, 재난을 맞기도 하고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기도 하지만 무한 반복하며 자기 사명을 살아간다. 사람처럼 같은 종이라도 각각 영혼이 있어 식물도 다시 태어나면 다른 영혼인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식물의 무한 반복은 알면서도 매번 기대된다.


작가의 이전글 생명이 있는 나무, 생명이 없는 나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