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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 탈출, 미국에 내 자리가 있나요?

우리에게 은퇴는 없다.

by Mollie 몰리

남편은 미국에 온 뒤로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실업자가 되었다. NIW 승인이 되어, 핑크빛 미국 생활을 꿈꾸고 최대한 정착이 잘 될 것 같은 주로 이동했다. NIW 비자는 주(State)에 대한 제한이 없어서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어디로 정착하느냐를 결정하는 부분에서 단점이 되기도 했다.


취업 걱정을 하는 남편에게 "에이, 설마 안 되겠어?"라고 철부지 소리를 하며 그래도 가능성을 가지고 기대를 했던 우리의 예상과 다르게, 예측 불가한 상황이 벌어졌다.

한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지?

그래도 다들 사정이 있겠지라며 애써 추스르며 사람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뒷말하지 않는 남편을 보며 더 안 쓰러웠다.


그렇게 1달, 2달... 6개월이 지나고 미국 내 취업을 위한 부단한 노력에도 번번이 서류 통과에도 거절되는 자동 메일들, 진짜 현지 미국 회사들과 면접 후에 팔로업이 없거나, 1차 면접을 통과해도 2차에서 떨어지기 일쑤였다. 미국의 작은 스타트업 회사부터 또는 이런 곳에서 나를 면접을 본다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두려움 반, 설렘 반의 미국의 유명 회사들까지 영어가 원어민 수준이 아니라서 그런지 최종 합격까지 가지는 못했다.


그렇게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고 작년 겨울과 봄은 정신적 스트레스와 우울감이 최고치를 찍었다. 아... 또 시작됐다.

내가 왜 이곳에 왔지?

내가 왜 잘 다니던 직장을 두고 미국에 왔지?

내가 왜 NIW를 시작했지, 괜히 승인이 돼가지고... 나 같은 사람이 여기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고.


점점 더 깊은 지하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자존감 바닥과 의욕 상실의 모습은 나와 아이의 삶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우린 가족이었고, 주수입원이었던 가장의 무너짐으로 너무 아팠고 고통스러웠다. 특히 20년 가까이 쉬지 않고 직장생활을 하며 달려온 남편 입장에서는 갑자기 주어진 계획과 미래가 보장되지 않은 이 끝없는 휴식은 견디기 힘들었다.


미국의 물가는 또 왜 이리 비싼지, 아무리 아끼고 아껴도 최소 $4,000, 한화로 약 500-600만 원은 족히 나가니, 마트에서 마늘 하나 사고, 장을 보러 가자고 말을 꺼내는 것조차 눈치가 보여서 주부로서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었고, 잔고가 줄어드는 게 눈으로 보이며 통장이 텅장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남편은 내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던 즈음부터 완전 취업을 포기했다. 포기했다는 게 아예 내려놓은 게 아니라, 조급하고 다급하고 자신한테 전혀 도움 되지 않는, 히스테릭했던 본인의 모습을 내려놓았다. 취업이라는 게 자신이 아무리 아등바등해도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며 오히려 마음을 비우고 그나마 내가 벌어오는 푼돈으로 네가 우리를 먹여 살리라며 농담도 하며 모든 걸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그제서야 그에게 먹히는 순간이다.


나는 그냥 신입이다. 내 경력을 내세울게 아니라, 나는 새로운 땅에 뚝 떨어진 이방인이다.

부족한 걸 채우며 때를 기다리고, 상황을 받아들이자. 영주권은 취업의 한 요소일 뿐, 성공을 보장해주진 않는다.


그때부터 대학 수업에 영어 수업도 등록해서 외국인들도 만나고, 영어 숙제도 하며 다시 학생으로 돌아간 듯한 모습으로 자기 생활을 하고, 운동도 하며 일상을 조금씩 되찾자, 늘 어둡고 그늘졌던 그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한숨 소리 대신에, 해야 할 영어 숙제에 허덕이며 오랜만에 바쁜 그의 모습을 보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민 온 지 10개월이 되어 남편은 첫 잡오퍼라는 걸 받게 되었다. 눈물과 감격의 순간이다. 여러 조건과 상황은 탐탁지 않은 점도 있었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을 가릴 때가 아니다. 우리로서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심정이다. 다른 기회도 주어졌지만, 제일 확실하고 믿음직스러운 끈, 그 끈을 잡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무엇보다 미국에서 인생의 은인을 만났다. 누구보다 책임감있고 성실한 남편에게 때가 왔다. 미국 영주권을 하나 달랑들고 있지만, 미국 회사에서 검증되지 않은 지원자, 다들 찔러만 보고 남들이 선택하지 않은 남편을 우리가 예상하는 여러 리스크에도 묻지 않고, 오히려 묵묵히 믿어주고 험한 곳에서 우리를 건져주었다.


© Marten Bjork, Unsplash


흙탕물 속에 박혀있던 남편을 흙 속에서 때 묻은 진주를 발견하여 묻어있는 흙을 조심히 털어내고 반짝이는 별을 달아 세상의 빛을 보게 해 주신 분 덕에 드디어 출근이라는 걸 하게 되었다.


차 한 대로 정말 생활의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무직에 어디 가서 든 당당하지 못했는데, 미국에서의 첫 직장이 생기게 되면서 차도 한 대 더 구입하게 되었다. 그동안 고생했던 남편이 원하는 차로, 그리고 드디어 우리도 회사와 고정적인 수입이 있으니 Financing(할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

이제 남편 취업했으니, 아르바이트는 그만두는 거냐고. 아니다. 나 역시 미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배우는 것도 많고, 집순이로 살면서 몰랐던 사람들을 관찰하고 겪으며 감동하고 감탄하고 공감하는 사회생활이 꽤 재미있어서 체력이 따라주는 한 계속할 생각이다.



이 글을 쓰기 얼마 전에, 남편은 결국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게 돌고 돌아서 정말 말도 안 되는 우여곡절을 겪고, 떨리는 손으로 원치 않는 사직서를 내야 했던 회사의 미국 지사로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은 견디기 힘들었지만,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결국 그 선택이 현재 우리 가족에게 가장 큰 선물이 되었다. 거리도 더 멀고 일도 훨씬 힘들지만, 이미 인맥이 두텁고, 친분과 신뢰가 쌓여 있어서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는 시간과 스트레스가 줄고, 무엇보다 다시 돌아가고 싶어 했던 애정했던 고향 같은 회사의 미국 지사에서 다시 근무하게 되어 남편한테는 이보다 좋을 수 없다.


미국, 중국과 한국의 그의 지인들, 그리고 회사 이메일의 참조에서 남편의 이름을 본 한국 직원이 아침부터 너무 반갑다고 난리가 났다. 한국과 다른 점은 매일같이 도시락을 품 안에 끼고 출근하고, 한국인들 외에 미국인들, 외국인들과 일을 해야 한다는 거다. 이제 미국 출장도 신바람 나게 다니게 될 생각에 남편은 또 들떠있다. 그 모습을 보니 그동안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1년 넘는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나 또한 이제 와서 이야기지만 너무 힘들었는지 이제 남편이 얄밉기 시작했다.


그 거봐, 내가 좀 때를 기다리라고 했잖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선순환'이야. 긍정적으로 살면 좋은 에너지가 좋은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믿음이 있어. 살면서 수차례 경험하기도 했고. 이제 너무 돈돈 거리지 말고, 내 행동에 간섭금지다!!


우리는 둘 다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앞으로 은퇴는 없다고.

은퇴도 경험했겠다, 백수 생활도 해봤겠다, 잃을 걸 다 잃어보고 바닥을 찍었으니 이제는 올라갈 일만 남았다. 앞으로 또 어떤 시련이 닥칠지 인생은 그 누구도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지만, 결핍과 어려움을 극복하면 내면이 더 단단해지고 부족한 경험이 많을수록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과 겸손한 태도를 가지게 된다. 또 평범한 일상도 소중하게 느껴진다.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닫는 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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