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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이민 1년 후, 얻은 것과 잃은 것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by Mollie 몰리

어느덧 미국에 이민을 온 지 1년이 지났다. 아직도 내 머릿속에는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주재원 귀국 후 1달 만에 후다닥 강제 이민 준비를 하고, 다시 인천공항을 찾았던 출국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3단 이민 가방과 캐리어 6개, 그리고 기내용 가방조차 보따리 같은 천가방 1인 1개씩, 마지막으로 각자 백팩을 메고 출국게이트에서 비행기를 타며 정말 떠나는 게 맞는구나를 실감했고, 비행기에서 온갖 영어 욕설로 술주정을 하던 난생처음 보는 옆칸의 아저씨로 인해서 사건 사고가 나는 건 아닌지 불안에 떨었던 그날의 기억.


뜬눈으로 지새워서 도착한 미국, 진짜 와버린 이곳. 마지막 입국 프로세스에서 You're all set. 이라며 1년간 유효한 영주권을 대신할 스탬프를 받고 긴장이 조금 풀렸지만, 밖에 내리는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앞으로의 우리의 이민 생활의 고난을 예상했다.


1년을 지나고 보니 어떻게든 버티면 살아지는 게 이민 생활인 것 같다. 장난스레 '살아보다 안 되면 돌아가죠.'라고 뱉어냈던 무책임했던 말에 이제야 반성을 해본다. 만일 우리가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았다면 수백 번은 더 짐을 쌌을 거다. 오히려 '어떻게 온 이민인데 이걸 포기해. 대한민국 억척이 아줌마가 칼을 들었으면 뭐라도 썰자며, 갈 때까지 가보고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 이런 악착같은 마음이었기에 그나마 견뎌냈던 것 같다.


적응의 끝은 없다. 눈뜨고 살아가는 매일의 일상이 새롭고 하나 해결하면 내일 또 무슨 일이 터질까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게 해외생활의 어려움이지만, 또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 작은 무언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살고 싶은 이유와 원동력이 된다.



1-3개월은 신분, 은행, 집, 차, 학교 등 기본적인 삶을 위한 정착에 바빴고,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길을 힘든지도 모르고 헤쳐나갔다. 4-6개월은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이 점점 흘러가는데 반해, 점점 취업이 안 되는 불안함과 한국에서 가져온 이주비가 바닥을 보이며 이 돈으로 얼마나 살 수 있을까를 걱정하며 끝이 보이지 않던 구차하게 살던 시절까지 우리가 선택한 길이지만 정말 파란만장했던 시간인 것 같다.


난생처음으로 돌발성 난청과 이명, 그리고 신경성 소화장애가 생겨서 미국에서 첫 병원 진료도 해보고, 1년의 절반 이상은 한약을 달고 살며 정신줄을 붙잡고 살았다. 아이도 갑작스레 고열이 나는데 병원에 갈 줄을 몰라서 보호자인 부모가 어리바리한 채로 얼전케어에 갔던 일들, 또 열이 떨어지지 않아 마음 졸였던 날들도 있었다. 일일이 나열을 못할 정도로 살아보지 못한 삶을 1년 동안 살았다.


무엇보다 미국에 잘 적응해나가고 있는 아들과, 미국에 온 걸 후회하는 듯한 남편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껴서 양쪽의 비위를 맞춰가며, 아들한테 마음고생도 시키고, 미국에 오지 않았으면 겪지도 않았을 일을 통해, 그래도 서로 다른 우리 가족 3인방은 가족이라는 틀에 있지만, 결국 각자의 생각에 따라 자기 갈 길을 가고 자신이 가진 모양에 색깔을 입히며 더 자신의 개성이 강해지게 되었다.



이민 와서 적응하고 취업하는데 최소한 1년은 걸릴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냥 웃어넘기며 '우리는 아닐 거야. 설마... 늦어도 6개월 안엔 모든 게 정리되겠지.'라고 주제넘게 생각했다가 설마가 현실이 되면서 점점 겁이 슬슬 나기 시작했던 건, 아마, 우리가 너무 아무것도 몰랐기에 멋모르고 겁 없이 미국 이민을 선택했기 때문이 아닐까. 독립적으로 오는 이민의 삶이 이럴 줄 미리 알았더라면, 만일 작년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감히 덤빌 수 있었을지 그건 아직도 잘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면 NIW 비자는 우리 가족이 당시에 선택할 수 있었던, 또 지금 나이에 도전해 볼 수 있었던 가정 가성비가 좋고(타 이민에 비해 비용이 낮음) 단기간의 집중과 노력으로 최대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지만, 이 또한 우리처럼 취업이 안 돼서 바닥까지 찍을 각오까지 해야 하니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인생의 당연한 진리 같다.


주변에도 영주권 스폰을 받기 위해서 회사를 옮겨가며 마음 졸이기도 하고, 가족을 위해서 미국에 남아야 하니 회사에서도 내부 정치를 하는 사람들도 있고, 다들 각자가 처한 환경에서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해 하루하루를 버티고 살아가는 듯 보이는 미국 이민 생활이다.


어찌 됐든 1년이 훌쩍 지나서 돌이켜보면 아들도 미국 공립학교에 잘 적응했고, 자기 할 일을 알아서 잘하고 있고, 나도 건강을 좀 잃기는 했지만 살아보지 않은 제2의 인생을 미국 땅에서 하고 있으니 그래도 만족스럽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우리 집 가장 문제아들이었던 남편은 나와 다른 성격에, 하지 못한 걸 후회하기에 바빴고 환경과 생활이 바뀌니 사람이 성격까지 바뀐다는 걸 이곳에서 지켜보았다. 내가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었던 '내가 리엔트리 퍼밋 써서 한국에서 일하고 온다고 했잖아.' 이 얘기만 100만 번째. 그리운 중국 주재원 시절 회상 100만 번째, '너희들은 미국이 좋아서 좋겠다, 그런데 난 아닌 것 같다, ' 50만 번째. 또는 사업이라도 해야 할까 싶어서 실제로 사업처에 연락까지 하며 마음을 다잡지 못했었지만, 감격스러운 취업으로 다시 자기 자리를 찾자, 언제 그랬냐며 지금은 내 말에 동의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리엔트리 퍼밋을 쓰고 한국에서 경제활동을 해서 우리에게 돈을 보냈다면, 당장은 돈걱정이 덜했을지 모른다. 그 1년 동안 수입은 더 있었을지 몰라도 그 기간이 끝나고 미국에 넘어오게 될 시점에 지금 우리가 겪었던 일련의 과정들을 다시 겪어야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감사하게 내가 운전도 못하고 혼자 이곳에서 아이를 키울 배짱도 없어 기러기를 할 자신도 없고, 아들도 아빠의 존재가 아이의 숨통을 트일 수 있는 둘의 사이를 알기에 나의 욕심이었을 수도 있지만, 결과가 좋으니 또 내덕 아니냐며 이렇게 숟가락을 또 얹어본다.



우리가 이렇게 미국 생활을 위해서 적응하지만 이방인, 이민자로서의 삶은 또 녹록지 않다. 하필 당시에 미국에 대해서 한참 후회를 하던 남편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억울하게 경찰에게 당하는 일이 생겼고, 이 일은 우리를 또다시 한 번 좌절에 빠뜨렸다. 다시는 꺼내고 싶지 않은 그날의 기억, 여전히 지금도 순간의 해프닝이었지만 우리의 마음 저 어딘가에 잠시동안 묻어두고 싶은 그날은 살면서 최대의 수치심을 느꼈던 날이다.


어쨌든 긴긴 어둠의 터널 끝에 남편은 이제 직장이라는 곳에 다니기 시작했고, 나도 일하러 갈 직장이 있고, 아들도 학교 생활을 잘하고 있으니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가족이 떨어져 있지 않으니 이 또한 복이라고 생각한다. 아침마다 3개의 도시락을 싸며, 내가 내 도시락을 들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건 마치 매일 소풍 가는 기분이라며 남편한테 이야기하니, "좋겠다. 소풍 맨날 가서." 왠지 놀리는 것 같지만 아직도 아르바이트하는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남편이다.


중국에서, 그리고 미국에서 해외생활을 하며 여러 어려운 현실들을 겪고 나니 그냥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자신감과 나는 이 땅의 외국인 노동자다, 또 살아보지 않은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앞으로도 잘 살아보려고 한다.


멀리서 알게 된 우리와 같은 처지의 가족들이 우리보다 더 오랜 기간 취업이 안 돼서 힘들어하기도 하고, 정말 다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분도 간접적으로 뵈었다. 우리도 당시에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았지만, 우리처럼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신 이민 가족분들에게 시간이 지나 때가 맞으면 길이 열린다는 작은 희망의 마음과 말이 그들에게 닿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그래도 내가 느낀 미국은 기회와 자유의 땅임에는 분명한 것 같다.


© Swapnil Bhagwat,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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