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차 회사원 '아는언니'의 두 번째 업무일지
안내해주시는 분을 따라 들어간 방에 5명의 긴장한 학생들이 나란히 일렬로 서있습니다. 맞은편엔 4명의 면접관이 서류를 봤다가 그들의 얼굴을 번갈아 봅니다. 몇 초간 정적이 흐르고 이윽고 침묵을 깬 면접관은 자기소개를 부탁합니다. 이미 앞선 몇 시간 동안 그룹토론과 실전 업무처리 시뮬레이션으로 그날 써야 할 두뇌 용량을 다 써버린 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지원자들은 이날이 다시 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 본인을 맞은편 면접관에게 각인시킬 수 있을지 바쁘게 머리를 굴립니다. 혹은 미리 준비했던 자기소개를 줄줄 읊어냅니다.
다음으로 면접관은 지원자에게 영어, 혹은 자신이 지원한 제3 외국어로 본인의 장점에 대해 이야기해보라고 합니다. 제 오른쪽 지원자는 대학 다닐 때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지만 낯익은 것을 보니 학교 선배임이 틀림없습니다. 그가 전공어인 포르투갈(브라질)어로 자신을 소개를 합니다. 다음으로 포르투갈어 전공자인 저도 포르투갈어로 제 성격의 장점을 업무와 연관시켜 이야기를 합니다. 마지막 분은 스페인어를 전공하고 외항사에서 승무원으로 일한 경력이 있어 스페인어로 대답합니다. 아차! 맞습니다. 이곳은 해외마케팅을 지원하는 면접장입니다. 해외 마케팅, 그중에서도 중남미에서 쓰는 언어를 전공한 사람들을 그룹으로 묶어 면접하는 중입니다.
이미 서류 전형을 통과하고 모인 사람들의 실력은 도토리 키재기로 고만고만할 텐데, 글로벌 기업의 해외마케팅 직군 면접이라 외국어로 진행되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입니다. 몇 개의 질문이 공통적으로 지나간 후, 면접관이 저를 콕 집어 물으십니다. "혹시 브라질의 가장 큰 유통이 무엇인지 압니까?" 유통이란 것이 무엇인지 가물가물한 저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싶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되묻습니다. "쇼핑몰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다면 '싸다싸'입니다." 찰나의 순간 떠오르는 것이 브라질 교환학생 시절 홈스테이 가족들과 주말마다 가서 몇 시간씩 장을 봐오던 쇼핑몰이라 그 이름을 말했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아니 그건 슈퍼마켓이고... 유통을 묻는 겁니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문과생이자 경영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제가 '유통'이 무엇인지 부끄럽게도 알지 못했습니다.
순간 떠오르는 '브라질 아빠'... 저를 딸처럼 보살펴주던, 브라질에서 인턴으로 일했던 레스토랑의 셰프이자, 주인인 아저씨를 따라 믹서기를 사러 단 한번 가보았던 그곳이 전광석화와 같이 스쳤습니다. 아저씨는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한국에서 온 여학생에게 하루 종일 브라질어로 말을 걸어주셨었습니다. 아저씨는 믹서기를 사러 간 그곳에서 "여기는 '다모아꿈동산'이야. 여기는 믹서기도 팔고 가구도 팔고 전자제품도 팔고 모든 걸 다 팔아."하고 이야기했었습니다.
(무언가 갑자기 뇌리에 꽂힌 듯) "아 유통 말씀하시는 겁니까...'다모아꿈동산'입니다." 저의 대답에 면접관들은 서로를 보며 눈빛을 주고받는 듯했습니다.
더 이상 추가 질문은 없었고 반나절을 거친 긴장의 시간이 끝났습니다. 안내해주신 인사팀 담당자분은 오늘 고생 많았다며 작은 봉투를 내미셨습니다. 면접비였습니다. '번번이 떨어지던 서류전형을 붙여 면접을 보게 해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수고했다고 수고비까지 준다고?' 생각하며 흰 봉투를 어수룩하게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대학교 2학년 때 졸업 후 전공을 살린 해외 마케팅을 한다는 꿈이 생긴 후, 취업 준비과정 내내 본 패배의 쓰라림은 저를 한껏 쪼그라들게 만들었습니다. 밝은 대낮에 이 건물에 들어와 면접을 마치고 나갈 때는 한겨울 이른 해가 지고 이미 어둑해져 있었습니다. 빌딩의 천장 아래 화려한 조명이 나를 감싸는데, '이런 곳에서 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멋질까?' 그저 동경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 겨울이 다 가도록 몇 주간 아무 연락이 없었습니다. 수없이 맛봤던 쓰라린 탈락의 고배가 떠올랐지만 애써 불안한 마음을 잊어버리려 노력했습니다. 그 사이 수술해야 하는 일이 생겨 난생처음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침대에 누워있었습니다. 하루가 무료하게 지나갔고, 치료를 위해 기다리는 것도, 회사의 결과 통보를 받는 것도 기다림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날도 병원에서 저녁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모르는 번호였고라 조금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x월 x일까지 건강검진받고 이상 여부 확인해주세요."라고 간단히 안내를 주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몇 번이고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면접 이후 발표가 날 때까지, 태어난 이후로 최초로 병원에서 수술을 했지만, 최종 합격 통보를 위해 무조건 회복해서 건강한 건강검진 결과를 제출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꿈에 그리던 중남미 해외마케팅팀으로 입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입사해서 알게 됩니다. 면접관이 물어봤던 브라질 최대 유통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 제가 (아리송했던 기억의 한 자락을 잡고) 대답한 '다모아꿈동산'은 브라질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그야말로 최고 중요한 바이어였습니다.
*본 글에서 나온 고유명사는 창작물임을 감안하여 일부 수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