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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다치지 않게

10년 차 회사원 '아는언니'의 첫 번째 업무일지

by 아는언니
'아는 언니'씨, 책상 위에 있는 약통은 보이지 않게 넣어두는 게 좋아.


입사한 지 7개월을 넘어가던 무렵 옆자리의 상사가 말해주었습니다. 그 선배는 당시 마초적인 분위기로 유명한 회사 조직 문화 내에서 젠틀한 매너로 소문난 분이었습니다. 약통을 꺼내놓으면 남들이 약하게 보니, 비타민이라도 책상 안에 넣어두고 꺼내 먹는 게 좋을 거란 호의에서 나온 조언이었습니다. 27살 한창 창창할 때인데 회사에서 채 일 년을 일하고 느낀 것은 '살기 위해서는 비타민이라도 꼬박 챙겨 먹어야겠다는 것', 그리고 '죽지 않도록 운동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갓 입사한 신입사원에게 회사의 분위기는 꽤 무거웠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상사들은 늘 화가 나 있었고 별거 아닌 것 같은 일에도 소리를 지르기 일쑤였습니다. 오죽하면 처음 출근한 날 자리에 앉았는데, 뒷자리 과장님이 수화기 너머로 'ㅅㅂ'하고 상대방에게 쌍욕을 하고는 전화를 던져버릴 듯이 쾅 내리치며 끊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꿈꾸던 해외 마케팅 업무에 그것도 제가 간절히 원하던 회사에 입사해서의 첫해의 회사의 분위기는 제가 꿈꿔온 게 맞는지 늘 의심하게 했습니다. 아주 무겁고 보수적이며 남성 중심적이었습니다. 팀에 여자사원은 거의 홍일점이었고, 여자 선배가 있다 해도 남자보다 더 무섭다는 '시어머니'급을 방불케 하는 캐릭터들이었죠. 요즘 말로 그야말로 쎈.언.니.

한동안은 '왕관을 쓴 자, 그 무게를 버텨라'를 실감하며 그 분위기를 씹어먹을 듯한 패기 있는 신입사원이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상사가 원하는 씩씩한 여사원이 되기 위해, 팀장님이 부르면 '네'하고 크게 대답하고 다다다 달려갔고, '다나까' (요즘은 군대에서도 안 쓴다는 '입니다' '습니다' 맞습니까?' 등) 말투로 말해줘야 깔보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무엇보다 여자라고 일에서 배제되는 것이 싫어서, '싫어'도 '좋아'도 그 표현을 못하고 '여자인척' 안 하는 것을 최대한 목표로 하여 나름 씩씩한 제 이미지를 만들어갔습니다. 마음속으로는 저 그 일 '못해요''싫어요'라고 하고 싶지만, 그렇게 일을 쳐내면 저에게 일을 주지 않을 것 같아서,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며 일을 받아왔고, 그 일을 해내기 위해 야근이든 주말특근이든 불사르지 않았더랬습니다.

일은 일이고, 당시만 해도 '회식'은 업무의 연장이라는 인식이 강해서 이 회식자리에서 남자 상사들과 위화감 없이 어울릴 줄 알아야 하는 것도 여자사원의 업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술자리에서 술을 잘 마셔야 여자라고 무시하지 않을 것 같고, 센 이야기들을 듣고도 아무렇게 않다는 듯 받아칠 수 있어야 그래야 일 잘하는 것인 줄 알고 사실은 속으로 엄청 놀라는 술자리 문화도 아무렇지 않은듣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려고 큰마음을 먹고 참석하고 끝까지 자리를 지켰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사실은 제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대학생 때까지만 해도 강철체력에 그렇게 건강했는데, 사회인이 되고 나서는 늘 달고 다녔던 것이 '면역력 약화'에 따른 극심한 생리통, 비염, 아토피 등등이었습니다. 생명에 지장을 주지는 않지만 극한 짜증을 유발하는 지병들이었죠. 평일에 회사에 있을 때는 긴장하여 아픈 줄 모르다가, 주말만 되면 골골대며 앓아누워있곤 했습니다. 불금을 즐기기는커녕 퇴근하자마자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에서 벗어나 집에 가서 혼맥, 혼치킨 하면서 쉼을 주고 싶을 때가 많았어요. 어느 새부턴 가는 금요일 퇴근 후에 헬스장에서 운동으로 푸는 것이 저의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이자 저를 지키는 방법이었던 것 같아요.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저 혼자 있는 시간이 편했습니다. 물론 사람들을 만났을 때 불편해 미치겠거나,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사람들을 만나는데 쓰는 에너지 소모가 주중에 집중해서 일했던 저의 에너지를 더욱 고갈시킨다고 느꼈던 것이죠.

한 번은 회사에서 일하다가 쓰러진 적이 있습니다. 마법에 걸렸을 때였는데, 여자들은 이 기간에 매우 예민하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더 힘들거든요. 여느 때처럼 자리에 앉아서 일하는데 어지럽더라고요. '이상하다... 이상하다...' 했는데 어지러운 증상이 심해지면서 앉은자리에서 픽 쓰러졌습니다. 저도 많이 놀랐고 당시 팀장님과 팀 동료들이 더 놀랐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잠시 기절하고 바로 정신을 차렸는데 너무 놀란 팀장님이 저를 택시 태워서 집에 돌려보내셨습니다. 혼자 가면 위험하다고 팀 내 여자 선배가 에스코트해주도록 지시하셨는데, 사실은 그 여자 선배가 제 회사생활에서 저를 제일 힘들게 하는 분이었어요. 그런데 아마 팀장님은 제가 그분 때문에 힘들어한다는 걸 모르셨던지, 아니면 팀에 여자는 유일하게 우리 둘이라 제가 편하라고 둘을 함께 보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택시 안에서도 저는 불편했습니다.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돌이켜 본 저는 제 자신을, 제 감정을, 제 힘듦을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던 것을 깨닫습니다. 그런 감정을, 제 컨디션을 돌보고 주변에 어려워말고 표현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아프고 힘들지 않았을 텐데, 저는 일터에서 강해 보이기 위해서, 남자 직원들과 어울리기 위해, 여자라고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제가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이 정도는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던 혹독함 때문에 저를 강해 보이게 포장하고 제 내면의 소리를 자꾸 무시해버렸던 것입니다.

그나마 이를 알아챈 그즈음부터 저는 살기 위해서 '딴짓'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실행해 나가기로 했습니다. 너무 늦은 것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제자신을 더 이상 방치하지 않고, 제 목소리를 정확하게 낼 수 있는 연습을 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저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했습니다. 엑셀, 피피티를 잘해서 보고서를 잘 만들고, 손익분석을 잘하고, IT 지식에 빠삭하면 선배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껏 살면서 늘 그랬듯 공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에 사로잡혀 주말에 학원을 다니며 영어공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시간이 지나 보니 그런 지식적인 것으로 무장하고 대화에서 지식을 뽐내면 오히려 '재수 없네''잘난척하네'라는 핀잔 어린 눈길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저를 싫어하는 상사라면 제가 무엇을 해도 싫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저는 빈틈없이 똑 부러지는 사람보다는 유쾌하고 활동적인 긍정적인 후배 사원이 훨씬 사랑받고, 그들에게는 선배들이 쉽게 마음을 연다는 것을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공부는 잘 못하는' 모범생으로 살아온 저는 공부하듯이 '딴짓'들을 해보기로 다짐합니다.

이건 인생공부야!
바로 딴짓!


처음 사내 뮤지컬 동호회 이야기를 들은 건 회사 스페인어 수업에서 알게 된 선배 언니를 통해서였습니다. 사내 동호회로 뮤지컬 동호회를 만들 예정이고 함께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 뮤지컬을 '보러' 다니는 동호회인 줄 알고 모임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두둥!' 뮤지컬을 '하는' 동호회라는 것입니다. 사회 동호회로 직장인 뮤지컬을 접했거나, 고등학교 대학교 등에서 뮤지컬을 아마추어로 해본 경험 있는 사람들이 모여있었습니다. 대화 속에서 그들은 어떤 뮤지컬의 어떤 노래가 좋은지, 캐스팅은 어떤 배우가 좋은지 줄줄 꽤고 있었습니다. 같은 뮤지컬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닌 진짜 마니아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에 비하면 저는 뮤지컬 지식이 전무한 것으로 느껴졌지만, 왠지 모르게 끌렸습니다. 아마도 내가 찾던 그런 인생공부를 이곳에서 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제 감은 빗나가지 않아, 이곳에서 만난 멋진 사람들 덕분에 저는 어떻게 사람들과 어울리는지, 어떻게 행복을 나눌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인생을 즐길 수 있는지 배워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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