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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보다 야근이 더 좋았어요

10년 차 회사원 '아는언니'의 세 번째 업무일지

by 아는언니

글로벌 마케팅 업무를 하면서 제일 재미있었을 때는 3년 차 때였습니다. 신규 제품의 콘셉트를 설정하고 각종 마케팅 자료들을 만드는 것까지 전 과정을 맡는 타스크팀이 꾸려졌습니다. 지난 2년 동안 회사에서 저는 '왜 내가 이곳에 있는가? 무얼 하고 있는가?' 알지 못한 채 시키는 것을 해내기 바빴습니다.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늘 무엇을 왜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고, 그저 시키는 것은 빠르게 해내야 했습니다. 대학 때까지 배운 것들을 사회생활에 활용하기보다는 그저 회사에서의 새로운 업무를 배우는 과정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타스크에서만큼은 그동안 대학에서 배운 것을 조금은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케팅이라고 하는 것을 진짜 할 수 있는 업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2년 내내 쭈굴쭈굴 소극적이던 제가 타스크 이야기 나오고, 각 지역 담당자를 한 명씩 뽑아서 글로벌 팀이 꾸려진다고 했을 때, 팀장님께 그 일을 하겠다고 적극적인 의사표시를 했습니다. 대학교에서는 외국어를 전공하여 어학을 무기로 입사했고, 학창 시절 외국어와 IT를 접목하는 프로그램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IT 관련 이수 과목들을 공부한 것을 이 타스크에서 활용할 수 있을지 않을까 나름 기대해보았습니다.

지역별로 한 명씩 모인 타스크팀에 합류되어, 킥오프 회의도 하고 첫 콘셉트 회의를 하고, 담당자별로 최종 결과물을 무엇으로 만들지 큰 그림을 그려가는 과정에 참여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무엇보다 제 스스로 일이 즐겁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첫 워크숍으로 신규 제품을 콘셉트를 무엇으로 할까에 대해 논할 때, 저는 처음으로 제 목소리를 내어 의견을 제시했고, 리더는 제 의견을 진심 귀담아 들어주었습니다. 이전 2년간은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처럼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말도 못 하는 척 선배들의 강한 기운에 밀려 기를 펴지도 못했다면, 이 곳에서는 고작 '사원 나부랭이'의 작은 아이디어도 귀담아 들어주는 리더가 있었습니다.

사원, 대리, 차장으로 직급이 고루 구성된 타스크인 만큼, 저의 업무는 저보다 선배 사원과 팀으로 구성되어 팸플릿과 제품 설명서를 만드는 일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주로 선배가 시키는 일을 팔로우 업하는 일을 해갔지만, 선배의 해외 출장이 잦아지면서, 제가 주도적으로 유관 부서와 외주업체를 통솔하며 회의를 진행하고, 상사에게 직접 보고할 일이 많아졌습니다. 같은 층 대부분의 이들이 퇴근하도록 혼자 남아서 일할 때가 많았지만 정말 일하는 것이 행복했었습니다. 가끔은 저를 먼저 두고 퇴근하는 타스크 리더가 제 자리로 와서, "아는언니 씨, 빨리 퇴근하고 데이트하러 가야 하는데... 먼저 퇴근하기가 미안하네..."라고 맘에도 없는 농담을 던지셨지만, 데이트보다도 일이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즐겁게 일한 만큼 결과물도 좋아서 제가 만든 자료를 전 마케팅 사원들이 활용하고, 해외 전 법인으로 뿌려져 마케팅 가이드라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케팅 담당자 전원을 대상으로 '제품 설명서'를 소개하고 보고하기 직전 긴장한 저에게 팀장님께서 해주신 말씀은 회사생활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는언니 씨, 잘못한 건 다 내 책임이고, 잘한 건 다 네 덕이야, 오늘 보고 때 하고 싶은 말 다하고 와."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런 상사가 또 있을까요? 하나부터 열까지 제 손으로 준비한 결과물을 소개하는 자리에 제 노력과 열정이 밑바탕이 되었기에 거침없었지만, 상사의 한마디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습니다.


보고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팀장님은 고작 3년 차 사원인 저에게 타스크에서 만든 마케팅 패키지를 가지고 중남미 전법인을 돌며 신제품 홍보를 하고 오라는 특명을 내리셨습니다. 중남미에는 브라질, 파나마, 칠레, 페루, 콜롬비아, 아르헨티나 총 여섯 개의 해외 법인이 있습니다. 이 중 다섯 법인을 모두 돌아서 신제품 교육을 하라시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저에게 두 번 다시없을지도 모르는 중남미 순회의 기회였습니다. 우선 대학생 때 1년간 교환학생으로 브라질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브라질에 가는 건 설레는 일이었고, 페루는 이미 세 번째 방문이었습니다. 칠레는 중남미의 유럽이라 칭해지는 국가라 치안 걱정이 되지 않았고 다만 콜롬비아 그리고 파나마는 저에게 미지의 세계였습니다.


약 10일 동안 5개국을 도는 스케줄을 확정하고, 사전 준비를 하면서 저는 더 많은 야근과 새벽 출근을 했습니다. 물론 힘들다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출장 준비하면서 가장 신경 쓴 것은 언어의 제약 없이 시청각 자료를 최대 활용하여 신제품 사용법과 활용을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웬만하면 현지에서 프레젠테이션 할 때 실제 신제품을 앞에 두고 시연할 수 있도록 미리 제품 수급 현황을 확인하고 기술 담당자들이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해두었습니다. 그리고 제품의 활용방안을 설명하는 예시들도 교육받는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수없이 시뮬레이션을 해보았습니다. 제품 시연 시 관심을 확 집아 끌 수 있도록 한국의 K POP 콘텐츠를 활용하고, 최신 유행하던 게임 콘텐츠를 미리 다운로드하여 저장매체에 담아두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중남미인 만큼 현지 언어로 프레젠테이션을 하면 더욱 친근하게 느끼고 신제품에 애정을 보일 수 있을 것 같아서 포르투갈어-스페인어-영어 세 가지 언어로 스크립트를 준비하였습니다.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브라질이었습니다. 제가 교환학생으로 있던 작은 시골마을이 아닌 상파울루 한복판에서 중남미 허브가 되는 곳을 눈앞에서 보니 애사심이 솟아났습니다. 해외 법인의 현지 직원들을 모아서 제품 설명회를 처음으로 진행했습니다. 포르투갈어로 설명회를 진행했고 유창하지는 않아도 의사소통에는 지장 없이 설명 가능했기에 당시 기쁜 마음을 페이스북으로 남겼던 기억도 납니다.


두 번째로 이동한 법인은 파나마였습니다. 파나마에 대한 편견은 이 나라가 매우 못 살 거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공항에서 도착해서 법인으로 가는 길에 본 파나마 시티의 정경은 그야말로 '탄성'이었습니다. 미국의 마이애미가 이런 풍경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고 으리으리한 빌딩에 시티로 진입하는 내내 탄성을 금치 못했습니다. 파나마에서 신제품 교육은 전체 프로모터 대상이 아니라, 두 명의 리더급에게 단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스페인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설명했고 두 분이 후에 전파교육을 할 수 있도록 진행했습니다.


칠레는 약 2일 정도 머물렀는데, 그 분위기기 남미인지 유럽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존에 생각하던 남미 분위기와 다른 정돈되고 차분한 분위기였던 것이 인상에 남습니다. 현지인을 모아서 교육했던 기억이 나지만, 참석자 반응이 냉랭하여 제품 홍보가 잘 되지 않을까 우려했습니다.


정말 놀랐던 것은 콜롬비아 법인이었습니다. 우선 공항에 내렸을 때 콜롬비아의 첫인상은 좋지 않았습니다. 하늘에 검은 구름이 뒤덮여있었고, 고지대라 그런지 장시간 비행 때문이었는지 도착한 법인에서 계단을 올라 2층 사무실로 진입했는데, 숨쉬기가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콜롬비아에서의 현지인 교육은 쌍방향으로 이루어져서 즐거운 추억으로 기억납니다. 다른 법인에서는 저 혼자 교육하고 참관인들이 일방적으로 설명을 들었다면, 이곳에서는 세일즈맨들과 프로모터들에게 과제를 주어 신제품을 가장 적절하게 홍보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오라고 일종의 이벤트를 한 것입니다. 이것은 콜롬비아 법인의 주재원과 법인장님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법인은 페루였습니다. 페루에서 또한 신제품에 대한 활용에 대해 주재원이 적극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어서 프로모터들에게 제품 소개를 할 때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제품 활용 방안에 대해 K POP 콘텐츠를 활용하여 소녀시대의 뮤직비디오를 캡처하고 편집하는 것을 보여주었을 때 매우 흡족한 반응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주재원이 이 제품을 페루 국가대표 축구팀에 후원하고 이를 축구 전략 설명 시에 유용하게 활용하는 것으로 홍보하여 신문에 기사가 나기도 했습니다. 제일 홍보효과가 컸고 판매성과도 좋았던 법인이었습니다.


거의 글로벌 최초로 지역 법인 전체를 돌며 교육하였기에 이후 저의 뒤를 이어 다른 지역 담당자들도 출장 다니며 제품 홍보를 했고, 저에게 제품 교육 자료를 요청하기도 하고 많이 활약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된 것 같았습니다. 돌이켜보니 좋은 리더를 만나 많은 역량을 펼칠 수 있도록 가장 지원을 많이 받았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일적으로 최고의 성취감을 느꼈던 출장 경험이었습니다.



기업에서 일하는 회사원이 되는 것을 '열심히 공부해서 고작 남이 시키는 복사나 하는 일'로 비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본인이 큰 꿈과 열정이 있고 분명한 비전으로 하나씩 실행하는 CEO 같은 일을 처음부터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응원할 일입니다. 하지만, 평범한 회사원이 되는 것도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충분한 하나의 길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곳에서 자신이 역할을 다하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길을 만드는 것은 본인이 하기 나름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일에 베테랑 선배들이 이미 많아 주눅이 들고 자신에게 중요한 일은 맡기지 않고 허드렛일이나 준다고 의기소침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선배들을 설득시키고, 예의 바르게 의견을 표현하고, 자신을 역량을 펼치는 일은 그야말로 '하기 나름'인 것 같습니다. 그런 진심과 열정은 선배들과 리더를 움직이고 본인이 인정받는 단 하나의 키가 될 것입니다.



2020년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정체된 해인 것 같습니다. 특히나 중요한 시작을 준비하는 고3 수험생, 취업을 준비하는 취준생에게는 얼마나 힘든 시기일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침체된 한 해에서 시작을 준비하는 이들, 목표가 뚜렷하지 않아 방황하는 이들이 제 자리에서 계속 자신의 꿈으로 가는 길을 구체화하고 실행해 갈 수 있도록 이 글이 도움이 되길을 바랍니다. 오늘도 2020 코로나 팬데믹을 살아가는 미생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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