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는 나의 기업에 대한 기준과 조건이 너무 환상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조건들이 합리적인 수준이기는 하나, 이상적인 기업의 모습인 것은 인정한다. 콘솔사를 그만두고는, 공기업 준비를 계속하면서 다닐 만한 기업을 찾게 된다. 이에 우여곡절 끝에 대기업 건설사에서 계약직으로 서무 업무를 시작했다.
좋은 점이 많았다. 계약직이라 책임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게 사실 가장 좋은 점이긴 했지만. 연차도 자유로웠고, 15분 단위로 시차도 쓸 수 있었다. 서무는 정규직과는 독립된 회계 업무만 처리하면 되어서, 시간도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한두 시간 산책을 하고 오거나, 카페에 다녀오기도 했다. 처음으로 한 기업에서 제대로 된 일을 한 경험이었다. 업무 프로세스 또한 혼자 해결하는 방식이어서, 모르는 것은 관련 부서에 문의하고, 처리하면서 일을 배웠다. 비록 작고 일상적인 업무였지만, 한 업무를 처음부터 끝까지 해결해 본 경험은 나에게 큰 자산이 되었다.
정규직들과 교류할 만한 기회는 거의 없었다. 탕비실에 뭐 사달라는 정도...? (ㅋㅋㅋ) 주로 같이 생활하는 것은 옆 부서 서무 친구였다. 우리 층에는 서무가 나와 그 친구 둘 뿐이어서, 서로 붙어 다니며 외롭지 않게 회사생활 할 수 있었다. 계약직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나와는 많이 다른 인생의 궤도를 걷는 사람들을 만난 느낌이었다. 보통은 야간 대학을 다니면서 서무 업무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전에는 회사에 출근하고, 오후에는 대학에 등교하는 삶이라니. 나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삶이었는데, 많은 친구들이 파견직 업무를 하면서 대학 공부를 병행했고, 2년을 채우고는 다른 기업에서 또 다른 2년을 채우는 경우도 꽤 많았다.
사실 이렇다 보니, 나는 아주 운이 좋게 면접에 합격한 케이스였다. 자유시간이 많은 직무라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든가, 야간 대학을 다닌다든가 하는 지원자를 선호하는데, 나는 이미 대학도 졸업했고, 공기업 시험을 준비한다고 밝히기는 어려웠다. 당시 우리 팀 전임자분이 곧 퇴사라, 바로 채용 가능한 나를 선택하신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면접자도 나밖에 없었다.) 내 자리 자체가 대단한 자격요건이 없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채용되면서 기업과 지원자의 시기와 조건이 맞아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공기업은 채용 프로세스 자체가 블라인드에 복잡 다단하다. 물론 지원자도 많고, 공공기관이다 보니 공정성 등 챙길 게 많아서이기 때문이겠지만, 기업과 맞는 지원자를 뽑아야 한다는 본질은 같을 텐데 준비하는 동안 혼란스러웠던 적이 많았다. 그런데 대기업 계약직 채용을 준비하면서 채용 프로세스 자체가 간단하다 보니, 확실하게 느꼈다. 시기와 운이 맞아야 하는 거구나. 어떤 준비가 되어 있고 지원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단시간의 면접을 통해서 알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적당한 사회성과, 적당한 열의와, 적당히 준비된 자세로 면접에 임한다면 누구나 채용될 수 있다. 그 외의 것들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 한번 채용 관련 유튜브를 본 적이 있다. 회계 파트에서 일하는 상급자가 면접 위원으로 나왔는데, ‘수를 헤아리는 꼼꼼함’이 있는 신입을 뽑았다고 했다. 다른 어떤 회계 자격증이나 경력을 보기도 했겠지만, 지원자 중 이러한 꼼꼼함을 대표 능력으로 내세우는 지원자를 뽑았다고 했다. 이러한 선택의 가장 큰 이유는 본인이 그러한 꼼꼼함이 부족해서라고 했다. 하나의 팀으로 일하면서 내가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성향의 신입을 뽑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회사 입장에서는 이것이 매우 합리적이고 당연한 선택이지만, 취준생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그 회사 내부에, 그것도 정확히 회계팀에, 이번에 공고난 포지션의 사수가 그러한 성향인 것을 외부인이 어떻게 알겠는가. 취준생의 입장에서는 이 모든 이해관계를 ‘운’과 ‘시기’ 정도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런 채용 과정을 거치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나의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는 나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미련이나 욕심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바를 하고, 그 외의 것들에는 후회와 미련을 남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