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Ms. Go
한여름에도 발끝까지 내려오는 롱패딩을 입고 지낼 수밖에 없는 신세야. 그것도 턱밑까지 지퍼를 올리고서 말이야. 추운 건 질색인데, 그렇다고 여름이 마냥 좋지만은 않아. 털 점퍼를 벗었다가 다시 입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다 잠든 여름날 오후.
“오른팔이…….”
잠꼬대를 다 하네? 얘 더위 먹은 거 아냐?
“오른팔이 움직이지…….”
자고 있지만 다 들려. 고양이는 말이야. 500미터 떨어진 사냥감 기척도 들을 수 있거든. 바로 옆자리인데 못 들을 리 없지.
“오른팔을 들 수가 없어!”
아직 덜 잤단 말이야. 얘는 왜 갑자기 헛소리를 해대는 걸까. 귀를 좀 닫을게. 마저 자려고 돌아누웠어. 어떤 까닭인지 뒤통수가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그 정도야 무시할 수 있었지. 다시 꿈의 문을 두드리고 새 한 마리 잡으려고 몸을 낮추는데 베개가 갑자기 출렁이는 거야. 화들짝 놀라서 일어나고 말았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는 미스터 초이의 얼굴에 황당함이 칠해져 있더군. 그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지. 늘 그랬듯이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간 생각이 빠져나올 기회를 놓쳤던 거야.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습관적으로 목덜미를 핥았지. 이렇게 시간을 벌어 적당한 대응책을 찾으려고 머리를 굴렸어. 1번,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는 표정으로 일관하며 목덜미 다음으로 배를 핥는다. 2번, 잽싸게 도망가서 거실 구석에 숨는다. 3번, 야생의 본능을 전부 모아서 실컷 으르렁댄, 다?
반격? 좋았어! 어쩌면 예상치 못한 반응이 미스터 초이의 정신을 흐트러뜨릴 수 있을지 몰라. 그래, 한번 해보자. 콧구멍에 힘을 주고 울부짖었어. 미아, 우- 이런, ‘아’ 음에서 그만 소리가 갈라져 전혀 사납게 들리지 않는 거야……. 서글프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풀이 죽은 울음이 되고 말았지. 제기랄! 갑자기 설움에 복받쳤어. 그깟 침대 하나 가지고 나를 이렇게 주눅 들게 하다니. 시치 팔자와 내 팔자는 왜 이리도 다른지.
시치가 누구냐고?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알고 있지? 오르가니스트이자 신학자. 음악과 신학으로 명성을 쌓고서, 소년 시절에 세운 계획을 실천하려고 서른 넘어 의학 공부에 도전한 사람. 왜 있잖아, 아프리카 가봉인가 하는 나라에서 여생을 의료봉사로 보냈다던. 이보다 더 훌륭한 점은 시치의 집사라는 거야.
미스터 초이는 책 읽다가 오래 기억하고 싶은 내용과 마주하면 내게 소리 내어 들려주는 버릇이 있어. 시치도 그렇게 알게 되었지. 얘도 나처럼 잠꾸러기인가 봐. 시치가 슈바이처의 팔을 베고 잠들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줬대. 움직이지 않고. 그것뿐만이 아니야. 의사니까 진료하고 처방전 써줘야 하잖아. 졸졸 따라다니다가 팔에 기대어 잠들 때가 많았다는데, 역시 최고의 집사는 달라. 사랑하는 고양이가 깨지 않도록 다른 팔을 움직여서 글을 썼다고 해. 말하자면 시치를 위해 양손잡이가 된 사람이야. 노벨평화상은 그래서 받았다지? 진정한 애묘인만이 거머쥘 수 있는 영예!
네가 침대에 대나무 돗자리 깔고 대자로 누워 자고 있기에, 신기해서 올라갔을 뿐이야. 발바닥에 퍼지는 서늘한 감촉! 있지, 우리 고양이는 일명 ‘젤리’로 불리는 쿠션 발바닥으로만 땀을 흘리거든. 땀구멍이 좁혀지는 느낌이 너무 좋고, 마침 적당한 팔베개도 있고 해서 잠시 누웠을 뿐이야. 라텍스 침대 구매해 볼까 누워보는 손님처럼 숙면 가능 정도를 측정해 보려고 말이야. 단지 그랬을 뿐인데, 긴 낮잠이 될 줄은 몰랐네. 팔에 쥐가 오르게 만들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언젠가 네가 말했지? 앎을 조금이라도 행동으로 옮기자고. 실천할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아. 잠시라도 슈바이처가 되어보는 게 어때? 그의 생명 외경 사상까진 바라지 않아. 그저, 서러움이 그렁그렁 맺힌 내 눈을 보라고. 지금 난 시치야.
나의 연기가 영화 《슈렉》의 장화 신은 고양이를 능가했는지, 미스터 초이가 오른팔을 주무르다가 왼손으로 내 머리를 쓰담쓰담했어. 내 그럴 줄 알았지. 난 ‘고 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