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Mr. Choi
대수롭지 않게 넘겨도 괜찮을까. 단순한 실수를 저질렀을 뿐인데 내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까. 자기가 눈 똥을 모래로 잘 덮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은가. 변기 물 내리는 걸 깜박한 모양이라고 넘기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을 굳히려고 하는데, 보도블록 틈에서 자란 어린싹처럼 머릿속에서 조심히 키워내는 근심.
고 양은 같은 실수가 되풀이하고 있다. 야생에서 배설물을 묻지 않으면 상당히 위험해진다. 자기 위치를 노출하여 천적으로부터 공격을 당할 수 있다. 위기를 감지한 사냥감을 놓칠 수도 있다. 생존 본능에 무뎌진 점을 간과해도 될까.
실내에서도 잘 묻어야 한다. 그래야 모래의 탈취 성분이 똥 냄새를 차단할 게 아닌가. 땅콩 부스러기가 박혀 있지 않아 ‘맛동산’이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했다. 스스로 영역 내 최상위에 위치한 포식자라고 선언하는 걸까. 넌 아무리 기고 뛰고 날아도 나한테는 대적할 만한 상대가 될 수 없어. 고양이보다 서열이 낮음을 진작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대놓고 행동 언어로 보여준 거라면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여전히 잘 먹고 잘 싸고 있었으므로, 똥 형태를 보아 건강 상태도 양호했으므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야 했다. 사료 통이 바닥을 보이기 전에 주문이나 해야 했다.
키튼 사료를 1년 먹이다가 어덜트 사료로 바꿨다. 성묘가 키튼 사료를 다시 먹어야 할 때는 임신기다. 사료에 영양분을 눌러 담아서 성장기나 뱃속에 새 생명을 키울 때 적합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어덜트 사료를 장바구니에 담으려는데 이런, 이젠 시니어 사료를 먹어야 해? 적절한 시기에 적합한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간 주식으로 바꿔줘야 신체 활력을 유지하고 비만의 가속도를 늦출 수 있다. 포만감을 높이면서도 고영양, 고지방 상태가 되지 않도록 조절한 사료가 왜 상품화되었겠는가.
아직 오십 대에 불과하다고 말해놓고 바로 말을 바꾸었다. 벌써 오십을 넘긴 거였다. 일반적인 고양이 나이 셈법은 간단하다. 첫 번째 생일은 성년의 날이기도 하다. 이후 나이 드는 속도가 둔화하지만 사람 시간보다는 빠르게 흐른다. 연을 넘길 때마다 네 살씩 더하기를 하면 된다.
몇 해 전에 이미 누나뻘이 되어 있었는데 고 양, 고 양하고 불렀으니 내가 괘씸하기도 했겠다. 항변의 표식으로 똥을 덮지 않았더라도, 건망증이 원인이라고 해도 이해해할 수 있었다. 우선 예의를 차리고자 호칭부터 변경하기로 했다. ‘양’을 대신할 만한 ‘씨’나 ‘님’보다는 ‘여사’가 좋겠다. 존중의 의미도 담고 패밀리네임 ‘고’와 만났을 때 어감도 나쁘지 않았다.
심장 박동 총량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종에 따라 평균수명은 다를지라도 심장 박동수는 15억 번 내외로 거의 동일하다고 한다. 심장이 느리게 뛸수록 장수할 수 있으나 고양이는 빨리 뛰는 편이다. 고 양, 아니 고 여사의 가슴에 손바닥을 대었다. 뒷다리 안쪽에도 손가락을 넣었다. 한참 후에야 심장 박동과 맥박이 미미하게나마 느껴졌다. 빨랐다, 나보다.
고양이 평균수명이 개보다 조금 긴 편이긴 하지만 태반의 집사에게는 짧을 뿐이다. 속절없이 한숨을 짓는다. 그들이 외치는, 우리 고양이 대학 보내자는 말에는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다. 대학교 입학 연령은 스무 살 안팎, 그러니까 20년 이상 함께 살자는.
길냥이 수명은 더 짧다. 영역 싸움에 밀려 위기에 처하기도 하고, 음식 쓰레기를 뒤져 먹다가 탈이 나기도 한다. 염분 과다 섭취로 신장에 이상이 생겨 몸이 붓는 고양이도 많다. 뚱뚱한 게 아니다. 질환으로 뚱뚱하게 보이는 거다. 겨울철에는 더 고생한다. 얼지 않는 물은 없으니까. 운 좋게 캣맘이나 캣대디 활동 지역에 산다면 수명을 더 연장할 수 있겠지만 보편적으로는 2~3년이라고 봐야 한다.
이스탄불의 길냥이의 평균수명은 이보다 길 것이라고 영화 《고양이 케디》는 말하고 있다. 공존하는 삶을 선택한 트리키에 사람들은 소유한 내 집이 내 것만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사람의 눈높이에서 벗어난 촬영은 불편함을 감수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거라고 피력한다. 고양이 시선으로 골목을, 도시를, 세상을 바라보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리운 것들만 돌아앉아 꼬리를 쓰다듬죠
혀끝으로 핥아보는 신음 소리
외롭다는 발자국은 도처에 있어요
◇ 이용한, 『낮에는 낮잠 밤에는 산책』 부분
오랜 세월 길고양이와 함께한 시인의 눈은 목탄이다. 눈동자가 움직이며 흑백의 스케치를 그리고 있다.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은 밝고 닿는 곳은 어둡다. 명암은 거리를 만들었다가 지우면서 그림을 완성한다. 위태로움이 뒤따르는 낮잠, 그 안에서 자기만의 속도를 유지하며 걷는 꼬리를 발견한다. 발자국이 많아서 덜 외롭겠다.
당장 내일 일도 내다볼 수 없긴 하지만 고 여사가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 확률이 높다. 보편성에 기댄 사실이 얼마만큼의 안심을 가져다준다. 내가 보내줄 수 있는 처지라서 다행이지 않은가. 이렇게 말해놓고 막상 그날이 닥치면 어쩌나, 침울해지기도 한다. 과연 난 잘 해낼 수 있을까? 의심의 끈이 너무 길다.
화가 발튀스는 소년 시절, 고양이 미츄를 잃었다. 몸져누운 날이었다. 몸이 회복되자마자 고양이를 찾아다녔다. 어디에도 없었다.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함이었을까, 미츄를 오래 기억하기 위함이었을까. 고양이와 함께한 첫과 끝. 그 사이를 수십 장의 드로잉으로 남겼다. 소년의 그림을 보고 예사롭지 않은 천재성을 간파한 시인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엄마의 연인이었던 릴케는 책 출판에 적극 나섰을 뿐만 아니라 서문까지 써주었다. 그의 말처럼 상실이 두 번째 소유가 될 수 있을까. 그렇다. 사랑하는 존재를 상실하면 내적인 움직임이 그를 복원해 낼 것이다. 하여 그를 더 자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내면에 깊이 들어갈수록 그를 세밀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열두 살 발튀스는 미츄와 다시 만나는 방법을 이렇게 찾아냈다.
사람 나이로 반백을 넘긴 여인이 아직도 ‘꾹꾹이’하는 습관을 버리지 않았다. 보통 사람의 복부처럼 말랑말랑한 부위나 부드러운 재질의 이불 위에서 두 앞발을 번갈아 누른다. 리드미컬하게 말이다. 안마를 해주는 것처럼 꾹꾹 누른다고 해서 꾹꾹이라고 일컫는다. 엄마 젖이 잘 나오도록 유두 주변을 눌러 짜는 새끼 때 행위를 잊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고 여사의 내면에도 엄마가 그려져 있을까. 그리움의 행동 언어를 반복하면서 때때로 엄마를 만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