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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야날자 Apr 10. 2024

다른 사람들도 스스로 책임지게 하라

'나는 내가 좋은 엄마인 줄 알았습니다 (The enabler)'를 읽고

남편과 아이 넷과 함께 살 고 있는 한 여자가 있다. 이사를 하는 날 이삿짐들은 모두 새 집으로 옮겨 놨다. 살던 집을 정리하기 위해 아들 셋과 살던 집으로 돌아왔다. 딸아이는 새집에서 주방 정리를 하겠다고 했다. 남편은 그곳에 없다. 새집에서 정리를 하나 싶지만, 남편은 우울증이 심해졌다고 여자가 쉬도록 내버려 두었다. 세 아들은 정리를 하면서 불만을 토로한다. 여자는 그것이 불편해서 결국 세 아들을 모두 보내고 혼자 남아 정리를 한다. 겨우겨우 마무리를 하고 새 집으로 간다. 집에 들어가니 아무도 없다. 남편과 딸은 자전거를 타러 나간다는 쪽지를 발견한다. 주방은 정리되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 주방 정리를 다시 시작하며 여자는 생각한다. '그래, 우울증인데 딸이랑 나가서 자전거 타고 오면 기분이 전환되겠지! 딸이랑 요즘 사이가 안 좋은 거 같던데 같이 시간도 보내고 더 좋네.'라고.. 


이 책은 enabler와 의존자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enabler, 의존자 모두 좀 생소했고, 88년에 쓰인 책인 데다가 알코올중독자가 있던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커서 부부를 맺고 일어나는 일들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전제들이 지금의 시대와 좀 동떨어진 듯 보였고, 알코올중독자가 있던 가정이라는 한정에 너무 다른 사람 얘기 같아서 책을 덮을까도 했지만 (알코올중독자(대부분 남성)가 있는 집은 부인이 모든 일을 책임진다. 생계도, 육아도, 가사도.. 그렇게 남편이 알코올중독자에서 빠져나오지 않아도 되게끔 오히려 그걸 도와준다는 것이다), 그걸 거두고 본다면  지금 시대 일반에서도 왕왕 일어나는 일들이다. 나도 의존자였다가 enabler였다가 하는 모습이 책을 읽으면서 상당 부분 보였다. 


일단 enabler는 무엇인가?  쉽게 말하면 다른 사람들의 책임을 대신 떠맡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위에서 이야기한 여자처럼 혼자 모든 일을 떠맡는다. 그렇게 떠맡는 게 버겁지만, 버겁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족을 사랑하고 내가 할 수 있음에 기뻐한다. 

그렇다면 의존자는 누구인가? 자신의 장애, 슬픔, 혹은 역경을 핑계 삼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회피하는 사람들을 의존자라고 한다. 


위의 이야기에서 여자는 enabler이고 남편은 의존자인 것이다. 의존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회피하는데, 그때 enabler 가 주변에 있으면 enabler는 그를 도와주면서 자신의 쓸모를,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느낌을 좋아한다. 그렇게 자신이 나서서 그 일들을 처리해 주면서 의존자는 더 의존하게 되고, enabler는 더 자신의 쓸모를 이유를 발견하며 뿌듯해한다.


극단적인 이야기들이기도 하지만, 나도 아이에게 그런 부분이 없잖아 있음을 느꼈다. 분명 아이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임을 알고, 혼자 해도 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해주게 되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보통은 내가 하면 더 빠르기도 하고, 정리할 것을 덜 만들기 때문이긴 하지만, 그렇게 아이가 직접 할 수 있는 일들을 내가 해주다 보면, 그 일은 계속해서 내 일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아이는 그 일을 내가 해도 되지 않는 일, "엄마 이것 좀 해줘"라고 말하면 처리되는 일이라고 생각해 버리게 된다. 나의 의도는 일을 좀 더 빠르게 끝내고자 하는 것인데, 나로서는 일이 많아져서 종종 짜증을 내기도 하고, 아이한테는 스스로 하는 뿌듯함을 못 느끼게 하고, 더 나아가선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이 일을 직접 했을 때 뿌듯함을 느끼면서 성장하는 것인데, 그 기회를 박탈해 버리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다가 일이 터졌다. 둘째 아들이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 것이다. 여자는 그 일로 무너져 내렸다. 왜 그랬을까? 자책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들로 무너져 내렸지만, 아이들이 셋이나 집에 더 있고,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밖에 없던 어느 날, 미뤄오던 정원 정리를 하기 위해 정리를 하다 수목 전문가가 나무가 해충에 시달리고 있으니 베어내라는 말을 듣는다.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나무를 베어냈는데, 저녁때 집에 돌아온 남편이 그것을 보고 길길이 날뛰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나무를 베어냈다고. 평소 같았으면 남편이 저러다 또 우울증에 빠지면 어쩌나 전전긍긍했을 텐데, 그날은 아들도 지금 입원해 있는 상황에 이런 일로 길길이 날뛰는 남편이 너무나도 짜증스러웠다. 입에 바른말을 내뱉었는데 오히려 상대방의 다른 반응에 정신이 번쩍 든다. 


용서할 수 없으리만치 잔인한 말을 퍼부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를 도와주려고 노력한 긴 세월 중에서
처음으로 그를 '진짜' 도운 것이다.


여자는 그렇게 깨달아간다. enabler와 의존자의 관계를..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자기가 얼마나 아이들의 자립을 방해해 왔는지 깨닫게 된다. 그렇게 변화는 시작된다.


자기 인생을 책임지게 가르치는 것은 부모로서 꼭 해야 하는 일이다. 부모 자식 관계가 아니더라도 부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 명이 너무 많은 책임을 지고 살아가는 가정은 뭔가 이상하다. 가족 구성원이 각자의 의무와 책임을 져야 한다. 요즘은 아이를 한 명 아니면 두 명 낳는 경우가 많다 보니 아이들에게 어떤 힘든 일도 안 시키려는 부모들을 자주 보게 된다(나 포함). 내가 지금 내 가정에서 너무 많은 책임을 지고 있지는 않은지, 아니면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에게 너무 의존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봐야 할 때인 것 같다. 


불행히도 나는 
'스스로 책임지라'라는 부분에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당연히 귀결인 '다른 사람들도 스스로 책임지게 하라'라는
부분을 놓쳐버렸다.


사진: UnsplashAntonio Jane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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