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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은 날

그래도 자리를 고쳐 앉고 뭐라도 쓴다. 나는 그것밖에 할 줄 몰라서.

by 은연주



시작은 누구보다 빠르지만 끈기가 다소 부족한 아이. 어린 시절 나를 한 줄로 평하면 그랬다. 아빠가 먼 옛날 내게 써준 편지에도 그렇게 쓰여있었다.



사랑하는 내 딸 연주야.

일 년이란 시간은 어찌 보면 길지만 아빠의 지나온 경험에서 보면 정말 쏜살같이 짧단다.

그래서 노파심에 그 귀한 시간을 하루하루, 아니 촌음을 소중하게 네 것으로 확실하게 만들기를 바란다.


아빠가 보기에 넌 타고난 재능이 무언가 분명 있어. 그런데 아쉽게도 그 능력을 백 프로 발휘하는 끈기가 부족한 것 같아 아쉽단다. 세상일은 결국 끈기로 이루어지는 거거든. 게으른 천재보다는 노력하는 둔재가 세상을 바꾸는 거야. '1만 시간의 법칙'이란 말을 들어봤는지 모르겠는데, 뭐든 1만 시간만 꾸준히 하면 그 사람의 타고난 능력이나 자질과 관계없이 자연히 그 분야에 일가를 이루는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고 하거든.

그러니 네가 스스로 너의 재능을 자각해서 꾸준히 노력한다면 넌 뭐든지 다 해낼 수 있을 거다.

네가 똘똘하다는 걸 아빠는 알거든.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은 하루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켜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지 모르겠다. 아침에 아빠에게 다시 한약을 먹겠다고 말을 바꿨다. 회사는 늘 그렇듯 무척이나 바빴고 쉽게 해결되지 않는 일 때문에 더 답답했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어느 것 하나 해결되지 않는 이 상황이 매우 지친다.


어른이 되면 폼나고 멋지게 살 줄 알았는데 책임질 게 많아질수록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겁다. 잘못은 남편이 해놓고 책임은 나 혼자 오롯이 지려고 애쓰는 게 버겁다. 엄한 곳에 아까운 내 에너지만 쓰는 게 꼭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 같다. 나는 고작 나만 책임지는 1인 가구인데도 이렇게 힘든데 그 시절 우리 아빠의 어깨는 얼마나 무거웠을까.




오후에는 반차를 쓰고 친구의 졸업 연주회를 보러 갔다. 베토벤 교향곡 중에 가장 좋아하는 6번. 전원 교향곡이라는 이름답게 자연의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곡. 그 곡을 친구가 지휘했다. 친구의 지휘봉 끝에 묻어나는 아름다운 음악이 지친 나를 조용히 치유해 주는 것 같았다. 이윽고 뒤풀이에서 모두가 남편의 안부를 묻는다. 왜 이렇게 한국에 자주 오냐며 궁금해하기도 했다. 다들 둘이라서 행복한 쌍쌍이다. 나랑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 누구는 벌써 만삭이고 결혼식이 얼마 안 남은 커플도 있다.


그들 앞에서 태연한 척 내 결혼 준비 과정을 들려주기도 했다. 누가 내게 곧 결혼 1주년 아니냐고 물어봤다. 다가오는 내 결혼 1주년에는 공교롭게도 정신과 방문과 심리 상담이 연달아 예약되어 있다. 일부러 그 날짜로 잡은 게 아니라 선생님들의 스케줄에 맞추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1년 전 결혼식을 올릴 때만 해도 1년 뒤에 나는 우울증과 공황장애에 시달릴 줄 몰랐다. 신혼여행을 가기도 전에 1주년에는 어디로 여행 가자고 웃으면서 이야기했던 우리였다. 그때 그의 속마음은 어땠을까. 속으로 행복해하는 나를 비웃으며 연기했을까.




하도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다 보니 이제 정말 아무렇지 않아진 건지 가끔 궁금하다. 오늘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남편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내게 신혼인데 떨어져 있어서 힘들겠다고 진심으로 위로해 줬다. 나는 그들의 진심을 진심으로 고맙게 받아들였다. 사람과 사람은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니깐. 아무리 상황이 골치 아프고 내 마음이 곯았어도 나는 상대의 진심을 온전히 받아줄 수 있을 정도로 사리분별이 가능하다.


게다가 솔직히 말하면 여전히 추억 속의 옛날 남편이 그리울 때도 있다. 나 참 가엾기도 해라. 애꿎은데 사랑을 퍼주고 혼자서 뒷수습을 하는 게 이토록 처량한지 몰랐다. 그럼에도 나는 나약한 사람이라서 가끔 좋았던 시절 생각이 난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들은 모두 나를 더 사람답게 만들어준다. 사람답다는 건 대체 무슨 뜻일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적어도 남편은 사람답지 않다. 그는 너무 뛰어난 IQ를 가지고 있어서 마치 고장 난 컴퓨터처럼 기계로서는 완벽했을지언정 사람으로서는 여러 가지 부분에서 고장이 났다. 머리가 좋으니 그 자신도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사람답지 않다는 것을. 남편은 그래서 그렇게 인간을 혐오했을까. 자기 자신을 혐오하는 건 얼마나 고통스럽고 불행할까. 그의 존재가 퍽 불쌍하다는 생각도 든다.




짧은 하루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직장인에게 하루 휴가를 쓴다는 것은 그 하루치의 일이 고스란히 쌓여서 전날이나 다음날 더 바쁘게 달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게 어른의 책임감이라고 생각한다. 타고난 끈기는 조금 부족해도 내가 아빠에게 배운 건 책임감이다. 책임감이 뭔지 몰라서 1인분의 사람 노릇을 하지 못하는 남편을 두고도 최선의 책임감을 다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노력이다.


오후 반차를 썼으니 오전에 더 바빴고 저녁에 잠깐 한숨을 돌리듯이 친구가 지휘하는 전원 교향곡을 들으며 마음의 상처를 조금 씻었다. 그리고 다시 가면을 쓰고 열심히 무탈한 척 연기를 했고 집에 와서는 마저 밀린 일을 하고 있다. 그 와중에도 뭐라도 쓰겠다고 자세를 고쳐 앉아 브런치에 접속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매일 쓰기로 나와 약속했으니 지켜야지. 대단한 글이 아니어도 이 글 하나로 오늘의 자아는 조금 더 성장했다.


나는 더 이상 끈기가 부족한 옛날의 그 아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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