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챙겨주는 말 한마디에 또 한 번 무너졌다.
회사에서 일하는데 아빠에게 연락이 왔다.
연주야 보약 한 재 먹으련?
아빠의 친한 선배는 강남에서 꽤 유명한 원로 한의사였다. 우리는 자라면서 종종 그 한의원에서 약을 지어다 먹었다. 내가 고3일 때도, 해외 파견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서도, 가끔 계절성 비염이 너무 심한 어느 겨울에도 아빠는 내 손을 끌고 선배의 한의원으로 향했다.
가장 최근에 그 한의원에 갔을 때는 남편과 막 연애를 시작했던 무렵이었다. 당시 나는 투잡을 하면서 연애까지 한다고 매일 피곤해했고, 아빠는 어김없이 내 손을 끌고 한의원에 가서 보약을 지어먹였다. 그때 처음으로 한약 값이 수백만 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아빠 나 이제 다시는 한약 안 먹어. 무슨 한약이 몇 백이나 해? 나 한약 안 믿어. 플라세보 효과잖아. 그냥 홍삼 먹듯이 먹은 건데 몇 백이면 절대 안 먹어. 그 돈 차라리 용돈으로 줘.
아빠는 내가 약혼을 한 뒤에 예비 사위를 아들처럼 끔찍이 아꼈다. 남편의 출퇴근 시간이 왕복 3시간으로 늘어났을 때 아빤 ‘길동아 보약 한 첩 먹자’고 말했다. 남편도 그런 대접이 싫지는 않은 눈치였지만 그가 휴가를 쓰지 않고서야 평일에 강남의 한의원까지 가는 건 쉽지 않았다. 아빠는 사위에게 보약을 지어주고 싶어 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차라리 다행히도) 시간이 없어서 실현되지는 않았다.
보약을 지어주겠다는 아빠의 문자 한 통에 순식간에 참고 있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애써 괜찮은 척하면서 일에 집중만 했지만 사실 지난주에 남편이 변호사를 선임한 사실을 안 뒤로 매일 수시로 공황발작에 시달렸다. 병원에서 받아온 필요시 약을 이미 다 소진해 버릴 정도였다. 한 때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나를 향해 망상을 펼치고 상황을 조작하고 악담을 퍼붓는 걸 두 눈으로 직접 읽을 상상을 하면 다리에 힘이 풀리고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아빠 나 괜찮아. 그 아저씨 한의원은 너무 비싼 것 같더라. 나 한약이 필요한 게 아니라 이혼이 필요해.
아니, 울증에 한약도 도움이 된대. 속병이잖아 그거. 화병 다스리는 거니깐 그래도 한 번 먹어보자.
내 우울증의 원인이 해결 안 됐는데 한약 먹는다고 그게 나아? 이혼도 못하고 사과도 못 받고 이렇게 방치돼 있는데. 아빠.... 나 이혼만 제대로 되면... 피해보상만 받으면 내가 알아서 다 나을 수 있어. 지금은 다 죽여버리고 신상 다 까발려서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차라리 내가 감옥 가고 싶다. 바깥이 더 괴로워서..
그건 그거고... 아빠는 네가 꼭 보약 먹었으면 좋겠다.
됐어, 아빠 건강이나 챙기셩~! 아빠 건강이 최고야. 알았지?
사실 나는 알고 있다. 아빠에게 자기 건강보다 소중한 건 나라는 걸. 아빠가 내게 보약을 권하는 그 마음이 무슨 마음인지 알겠어서 또 무너지고 무너진다. 망가진 딸을 보는 아빠의 애타는 기분이 뭔지 알 것 같아서 나는 또 지친다. 신이시여 제발 홍길동이 영원히 제정신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게 해 주세요. 생사람 잡아서 피눈물 뽑아낸 죄를 두고두고 받을 수 있게 해 주세요. 그가 뿌린 대로 거두게 해 주세요. 부디. 부디.
생각을 고치기로 결심했다. 내일 다시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서 한약을 먹겠다고 말할 것이다. 아빠에게만큼은 마음껏 응석 부려야지. 내 뒤에는 나를 사랑하고 안타까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든든한 가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