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숨은 그림 찾기 하는 심정으로 행복을 줍는 중이다.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이라는 그림이 있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서 실제 작품을 봤을 때 생각보다 큰 아우라가 느껴지진 않았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기분이었다. 저 여인들은 왜 이삭을 줍고 있을까. 풍요롭지는 않았던 그 시대의 농민들의 고달픈 삶이라더니 역시 사실적이군. 농민의 단편을 잠시 훔쳐본 기분이었다.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누가 그렇대?!'
생각해 보니 화가는 말없이 그림만 남겼을 뿐 저 그림 속 여인들의 인터뷰를 따지도 않았고 표정이 드러나지도 않았다. 미술관에 가기 전에 교양서적 이것저것 뒤적거리며 미술사에 대한 기초 상식을 쌓고 갔다 보니 이미 정형화된 해석이 마치 내 감상인 양 그대로 들어왔다. 물론 밀레는 농부의 아들이었고 평생 농촌의 일상을 그렸다.
하지만 저 그림 속 여인들이 무슨 기분이었는지 저 여인들 말고는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 저 때 유쾌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까르르 웃었을 수도 있다. 풍년이라서 기분이 좋았을 수도 있고 뼈 빠지게 농사일했는데 이제 집에 가면 남편 밥 차려줘야 할 생각에 아이고 망할 놈의 내 팔자야 하며 남편 흉을 봤을 수도 있다.
내가 매일 글 쓰고 열심히 일에 몰입하는 것을 누군가 그림으로 그려준다면 어떤 그림이 될까. 미래의 사람들은 그 그림을 보고 어떤 감상을 남길까. 당장 미래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어떤 느낌을 받을까. 관점에 따라 누군가는 내 글이 너무 처절해서 불쌍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내 불행에 새삼 자신의 다행을 비교하며 좋아할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너무 안타깝다, 그래도 내 남편은 정신이 건강해서 다행이야. 나는 참 행복하네. 남편한테 더 잘해줘야지.' 또 누군가는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동질감을 느끼며 눈물을 흘릴 수도 있고, 자신이 오랜 시간 상처받고 가스라이팅 당했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던 사람은 내 글에서 작은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심지어 아무개 씨는 신박하게도 내 글을 읽고 대뜸 결혼 시장에서 내가 '급'이 높은 '상급'으로 추측된다며 내 '급'에 대해서 평가하더니, 원래 멀쩡한 상급 남자는 희박해서 상급 여자는 결혼하기 어렵다고 갑분 계급론에 대해 일장연설하는 댓글도 달았다.(헐;) 이렇듯 100명의 사람, 100개의 생각처럼 사람들의 감상은 다양하다.
그러나 바라건대 나는 이 글이 그저 행복 줍기로 남기를 바란다. 글을 쓰는 이유는 스스로 위로를 건네고 실연을 애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런 건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일 뿐 그저 모든 감정을 기민하게 따라가다 보면 내가 깨어있음을 각성할 수 있으리라는 작은 희망으로 쓴다.
지난날 여행할 때는 인생이 길바닥에 있다고 믿었고 요가를 할 때는 요가매트 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단지 나에 대해 올바른 시각을 가지려고 계속 노력하며 타인에게는 그보다 더 따뜻한 시각을 가진다면 꼭 글쓰기가 아니어도 어디서나 무엇에서든 행복을 계속 주울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내게 무슨 일이 생겼든지 간에 이렇게 계속 행복을 줍다 보면 나는 지속적으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니 매일 무너지고 또 무너지는 증오와 원망 같은 거북한 감정 때문에 나 자신을 괴롭히지 말자. 이것조차 사랑스러운 나의 일부일 뿐이다.
나는 매일 행복을 줍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