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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연주 May 06. 2024

"믿지 마, 그거 쑈 하는 거야."

남편은 아무도 믿지 못했다. 남들도 자기처럼 다 연기하는 줄 알았던 걸까


어린이날 연휴를 맞이하여 부모님 댁에 갔다. 사실 비도 오고 청승맞아서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았는데 생각해 보니 당장 며칠 뒤에 어버이날이 있었다. 평일인 어버이날을 미리 챙길 생각으로 겸사겸사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5월이 가정의 달이라지만, 내 가정은 시작과 동시에 실패로 끝났다지만, 그래도 여전히 가족이라는 든든한 울타리가 있으니깐.


어버이날이니 내가 밥을 쏜다고 자신 있게 외치고 정작 메뉴를 고를 때는 부모님이 아닌 내 강아지만 고려했다. 외식을 안 좋아하고 가끔 외식하더라도 무조건 한식파인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는 유일한 비장의 카드가 바로 강아지였다. 강아지 동반 가능한 곳이 대부분 양식이나 카페 등 젊은이 취향의 장소이다 보니 부모님도 어쩔 수 없이 타협을 했다. 저녁에는 와인 한 병을 필수로 시켜야 하는 세련된 곳이었다.




기념할 일도 없고 기쁘지도 않지만 그래도 모처럼 가족끼리 와인을 마시는 거니깐 엄마 아빠랑 다 같이 와인잔을 맞대어 "짠"을 외쳤다. 건배사는 "건강합시다“였다. 참으로 어색했다. 다들 나처럼 생각했는지 건배사를 외치는 모두의 목소리 톤이 어정쩡했다. 딱 1년 전 내 결혼식 2부 피로연에서 부모님과 샴페인잔을 부딪힌 뒤로 처음 갖는 가족 술자리였다. 차라리 이 자리에는 소주가 더 어울렸을지도 모른다. 소주는 기쁠 때도 마시고 슬플 때도 마시지만 와인은 대부분 기쁠 때만 마셨던 것 같다. 가끔 청승맞은 기분으로 혼자 남은 와인을 한 잔 마실 때도 있었지만 이렇게 여럿이서 와인잔을 부딪히며 건배할 일에 딱히 슬플 일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와인을 정말 오랜만에 마셨다. 지난 1년간 와인을 마시고 싶은 순간이 1초도 없었다. 술이 고픈 날에는 주로 소주를 마셨고 그마저도 항우울제와 항불안제를 복용하다 보니 평소보다 술 생각이 들지 않았다. 혹시 우울이 나를 확 덮쳐 술이 필요한 날을 대비하여 냉장고에 무알콜 맥주만 구비해 뒀을 뿐이었다. 오랜만인 만큼 와인 한 잔만에 취기가 확 올라왔다. 눕다시피 집에 실려와 멍하니 TV만 쳐다봤다. 와인 몇 방울 입에 털어 넣었다고 저 깊이 침식돼 있던 해묵은 우울과 그리움, 막막함, 공허함, 서러움 등이 회오리치듯 마음을 어지럽혔다. 이 기분에 훅 끌려가지 않기 위해 눈이라도 화려한 걸로 현혹시켜야지. 영화 <위대한 쇼맨>을 다시 봤다. 언제 봐도 음악과 화려한 무대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영화를 보던 중에 문득 홍길동이 생각났다. 그가 자주 하던 말이 있다.


"믿지 마, 그거 다 쑈 하는 거야."


남편은 자기 동생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연애 초반부터 내게 자기 동생을 거의 인간 말종으로 묘사했었다. 학창 시절부터 사고만 치고 다녀서 부모님이 마음고생했다고, 어릴 때부터 여자 문제도 복잡했고 강제 전학이니 퇴학이니 그런 심각한 단어를 입에 올렸다. (이제는 그게 다 그의 거짓말이었다는 걸 안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막장이라며 치를 떨며 싫어했다. 나는 그런 남자친구의 말을 철석같이 믿으며 집집마다 원래 속 썩이는 자식 하나씩은 있는 법이라고 위로해 줬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결혼을 생각할 때쯤에는 '그 문제아 동생'의 존재가 조금 걱정되긴 했다. 사이좋은 우리 집과 달리 형제끼리 인연을 끊고 사는 게 과연 정서적으로 좋은 일일까, 나중에 가족 간에 큰 싸움이 벌어지진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다. 남편은 자기 동생을 결혼식에도 오지 말라고 난리 칠 정도로 싫어할 정도였다. 나는 당연히 연애하며 그의 동생을 만날 기회가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못된 놈인지 상상으로만 지레 겁먹었다.




하지만 결혼식장에서 만난 남편의 동생은 정말 호탕하고 인상이 좋았다. 심지어 결혼하는 자신의 형을 바라보며 행복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가 박수를 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내 친구들이 영상을 찍어 보냈다. '이 분 누구야? 이 분 진짜 감동적이었어. 무슨 영화 속 한 장면 같아서 나도 모르게 찍었어. 이렇게 행복하게 웃으면서 눈물 흘리는 거 완전 드라마 같더라. 오빠도 누가 이렇게 자기를 축복해 준다는 걸 알면 진짜 좋아하실 것 같아.'


결혼식이 끝나고 친구들이 보낸 영상을 본 나는 깜짝 놀랐다. 친구들조차 감동을 받아서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의 영상을 찍어 보냈듯이 그의 미소와 눈물은 진심이었다. 형의 새 출발을 힘차게 응원하는 행복 가득한 모습이었다. 이게 남편에게 말로만 들었던 그 나쁜 동생이라고? 말도 안 돼. 나는 남편이 자기 동생을 오랫동안 오해를 했다고 생각해서 동영상을 들이밀며 조심스레 말했다.


"오빠, 이거 봐봐. 오빠 동생이 우리 결혼 진짜 축하해 줬어. 내 친구들이 지켜보는 자기까지 감동이라고 영상까지 찍어서 보냈더라. 이제 동생도 다 커서 철들고 바뀌지 않았을까?"


남편은 힐끔 쳐다보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믿지 마, 그 새끼 쑈 하는 거야."

나는 남편과 동생 사이의 역사를 모르는 제삼자일 뿐이니 더 이상 말을 덧붙일 수 없었다.




그리고 심부름 사건이 터지기 하루 전날, 비행기에서 영화 <오토라는 남자>를 보고 꼭 자기 이야기 같다며 너 없이 어떻게 사냐고 펑펑 운 그 남자는 그날밤에도 비슷한 말을 했다. 비행기가 늦게 도착해서 피곤한데도 잠들기 전 꽁냥꽁냥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 오빠, 근데 이번에 짧게 서울 갔다 오느라 피곤하긴 해도 어머니 생신도 챙기고 우리 가족이랑 외식도 하고 너무 좋다, 그치?

- 응 근데 너무 피곤하다. 주말이 그냥 사라졌네. 그래도 그 짧은 시간에 혼인신고도 하고 미션은 다 클리어해서 좋네. 진짜 기적의 스케줄이었어.

- 근데 아버님이 오빠 결혼해서 너무 좋으신가 봐. 결혼식날 아버님 지인분들도 평생 그렇게 행복한 얼굴을 본 적 없다고 하셨잖아. 오늘 외식할 때도 이제 내가 정식 며느리 된 거잖아. 아들내외랑 처음으로 외식하는 자리라서 아버님 표정 더 밝으셨던 것 같아. 어른들 행복하시니깐 나까지 뿌듯하더라.

- 아빠? 그거 다 연기하는 거야. 쑈 하는 거야.


아니 이 남자는 왜 이렇게까지 자기 가족을 싫어할까. 대체 내가 모르는 무슨 상처가 있는 걸까. 내가 섣불리 건들 수 없을 만큼 큰 상처나 사연이 숨어있는 걸까. 분명 연애 시절에는 자기 아빠에게 연민과 존경의 시선을 말했던 남자였다. 뭐가 진짜인 걸까. 일단은 나도 피곤해서 더 건들지 않고 그대로 잤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사건이 터졌고, 남편은 폭발했다. 한순간에 180도 다른 사람이 되어 욕을 하고 소리를 질러대며 내게 이혼을 통보했다. 나는 남편이 연극을 때려치운 지도 모르고 대체 무슨 일인지 파악이 안 되어 마른 낙엽처럼 비틀어져서 죽어가고 있었다. 시어머니가 급하게 비행기를 타고 오셔서 남편을 혼내기도 하고 책망하기도 하고 달래기도 했다.


- 너는 연주한테 미안하지도 않니, 쟤 저렇게 밥도 못 먹고 표정도 어둡고 다 죽어가는데 넌 그게 보이지도 않니?

- 엄마 속지 마, 쟤 지금 쑈 하는 거야. 불쌍한 척하는 거야.




홍길동은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만 믿고 바깥세상의 것들은 모두 진정성을 의심한다. 자기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겐 끊임없이 나쁜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눈물 흘린 일, 너는 이제 내 가족이고 나는 가장으로서 너를 책임질 테니 자기만 믿으라고 말한 일. 모두 다 연기였고 가짜였다. 나야말로 그의 쑈에 놀아난 관객에 불과했다.


'저는 돈에 관심 없어요, 저는 돈 필요 없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돈에 제일 미친놈이라는 말처럼 아마도 그는 자기가 세상을 향해 연기를 하고 남들을 속이느라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들의 진정성마저 저버렸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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