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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연주 May 05. 2024

비 오는 어린이날의 단상

내가 만났던 홍길동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 환상 속 캐릭터였을지도.



약속도 없는데 하루종일 비가 퍼부으니 차라리 잘 됐다. 날씨가 좋았으면 내 상황과 대비되어 더 우울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가 처음 만난 해의 어린이날에도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우리는 장대비를 뒤집어쓰고 올레길을 걸었다. 인정하기 너무 분하고 애석하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여행은 그때였다. 내가 좋아하는 걸 똑같이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 서로의 취향을 향유한다는 게 이렇게 행복하고 충만한 기분이구나,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느꼈다. 거점 숙소를 잡은 뒤에 미니 배낭만 메고 가볍게 걷는 올레길이 아니었다.




숙소 예약도 안 하고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괜찮아 보이는 곳에 들어가서 방 있어요? 하고 그날그날 정했다. 그래서 무식하게 60리터 배낭을 메고 걸을 수밖에 없었다. 아침저녁으로는 춥고 한낮에는 덥고 돌풍과 비가 예정된 일정이라 이리저리 챙길 옷이 많았다. 오랜만에 커다란 배낭을 메니 키가 실시간으로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발바닥이 불타는 것 같고 물집이 잡혀도 그저 좋았다.


배낭 끝에 작은 블루투스 스피커를 달고선 노래를 같이 들으며 제주의 풍경을 두 발로 담았다. 그때 처음으로 나 얘를 사랑하는구나 깨달았다. 우리가 만난 지 3개월 정도 지났을 때였다. 남편이 사귀기로 한지 하루 만에 사랑한다고 말해서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든 날로부터 몇 달이 더 걸린 셈이다.




제주도는 남편을 만나기 전부터 매년 3-4번씩 꼬박꼬박 갔는데 그때 기억이 여전히 제일 강렬하다. 오늘이 어린이날이래, 그래? 근데 이제 감흥 없어. 이런 대화를 주고받다가 문득 내가 말했다. “어릴 때 생각해 보면 어린이날에 괜히 기분 진짜 날아갈 것처럼 좋았어. 생일이나 크리스마스처럼.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아. 지금 진짜 행복해.”


홍길동 역시 자기도 그렇다며 우리는 계속 나란히 걷다가 가끔 좁은 길이 나오면 한 줄로 걷기도 했다.




한참을 걷다가 도저히 못 가겠어서 오빠 나 진짜 죽을 것 같아 하고 길바닥에 퍼져버렸다. 원래 목적지는 서귀포 시내였지만 위미항에 머물기로 했다. 내 저질 체력 덕분에 갑자기 도착한 위미항은 고즈넉하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군데군데 트렌디한 카페나 맛집도 있고 80년대 감성을 그대로 가진 구옥들도 여전히 건재했다. 우리는 또 상상놀이를 시작했다. “만약 제주에 산다면 위미항에 살자, 좋아! 근데 여기 딱 봐도 동네가 양지바르고 비싸보여. 원래 남원읍이 햇살 제일 좋잖아. 감귤도 남원에서 나는 게 제일 명품인데.”




작년 일도 아니고 연애 초의 일이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날 일인가.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긴 했나 보다. 그래서 더 배신감이 든다. 그때 나랑 같이 올레길을 걷고 뒤에서 힘내라며 내 배낭을 밀어주던 그는 어디로 갔을까. 그는 한순간도 진실되지 않았다고, 차라리 처음부터 연기에 충실했던 그저 배역에 불과하다고 믿는 게 내 정신 건강에는 더 나을 것 같다. 그와 관련된 모든 행복한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다. 비 오는 어린이날은 이제 자동으로 올레길이 생각나서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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