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 이혼녀 속마음: 오히려 좋아!
매일같이 나를 돌아보고 남편의 병명에 대해 숙고하던 지난날의 글쓰기가 이제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이혼이 끝난 것도 아니고 우울증 약은 오히려 더 늘어났는데 더 이상 매일 글 쓰며 나를 돌아보는 건 그만두고 싶어졌다. 대신 이 과정에서 내가 발견한 것들에 대해서 좀 더 심도 있게 쓰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왔다. '그래 일에 대해서 쓰자.'
어제저녁 퇴근하고 현관문에 붙은 우체국 부재중 쪽지를 발견했다. 'oo가정법원 oo지원'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남편의 변호사가 마침내 내게 소장을 보냈다. 4월 초에 그가 변호사를 선임한 뒤로 꼬박 두 달이 걸렸다. 어떤 내용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두렵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정신줄 꽉 붙들고 그 헛소리를 두 눈으로 똑똑히 읽어내는 것밖에 없다. 나도 얼른 변호사를 구해야 하는데 솔직히 내키지 않는다. 주변 친구들이 안타까워할 정도로 회사는 바쁘고 또 다른 개인적인 일을 먼저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해서 그 남자와 이혼을 간절히 하고 싶지만 내가 먼저 이혼을 서두를 정도로 그는 더 이상 내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어차피 이 관계는 그가 망친 덕분에 끝이 났고, 종이에 이혼이라는 두 글자를 받아내야만 내 인생이 변하는 것도, 내 마음이 변하는 것도 아니다. 안타깝지만 사실이 그렇다. 이 모든 건 홍길동이 자처한 거고 지금도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서 애타는 건 오히려 그 사람일 것이다.
우체국 쪽지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바로 노트북을 켰다. 이혼 전문 변호사를 검색하는 대신 VPN을 켜고 회사 네트워크에 접속했다. 감기에 걸려 몸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럼 일찍 들어가서 푹 쉬세요,라고 말해주는 동료들. 하지만 현실은 일찍 퇴근하고 집에서 잔업을 마저 해야만 했다. 대수롭지 않게 저녁 대신 감기약을 털어 넣었다. 그게 지금 회사의 특징이다.
이런 회사에 불만을 가지거나 불평을 하지도 않는다. 그냥 문화가 그렇다. 워커홀릭만 살아남는 회사. 일에 미친 사람들이 다니는 곳. 일을 숭배하는 자들을 위한 곳. 놀랍게도 우리 회사에는 의외로 기혼이 꽤 많은데-사회적으로 요즘 젊은이들의 결혼 비율이 높지 않기 때문에- 나야 다시 돌아온 1인 가구라서 그렇다 치고 대체 저 사람들은 어떻게 이 회사에 다니지? 집에서 가족들의 원망이 없을까 괜히 걱정될 정도였다.
동료 모 씨가 그런 말을 했다.
“여기는 결혼은커녕 연애도 못 하는 회사잖아요. 그래서 기혼이신 분들은 다 이직으로 들어오셨고, 여기서 시작한 분들은 거의 아무도 결혼 못했어요. 연애할 시간도 없는데 어떻게 결혼을 해요? 전 여기 다니면서 연애 포기했어요. 아니면 결혼이 하고 싶어질 때쯤 그냥 회사를 때려칠려고요.“
듣고 보니 일리 있는 말이었다. 팀원들은 거의 다 솔로였고, 연애를 해도 데이트를 자주 못해서 대부분 연애 사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근데 연주님은 남편분이 이렇게까지 야근하는 거 안 싫어하세요? 아무리 롱디여도 그렇지 카톡 할 시간도 없는 거 아니에요? 두 분은 대체 언제 연락하세요?”
“저희 원래 연락은 잘 안 해요. 저는 결혼하고 나니깐 원래 사는 게 다 이런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의 뒷모습엔 사실 야근으로 점철된 아빠와 거의 혼자서 키우다시피 한 엄마가 있다는 거요. 전 애도 없으니깐 이렇게 사는 게 당연하죠.”
가족을 최우선 가치로 생각하고 가족적인 가족에서 자란 내가 이런 말을 하다니. 순식간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내 모습이 낯설었다. 나는 원래 워라밸이 좋은 회사를 항상 우선순위에 뒀다. 적당히 일하고 가정도 꾸려나가는 황금 밸런스의 삶을 추구했다. 전 직장을 골랐던 이유도 ‘여자가 다니기 좋은‘ 회사여서 그랬다. 그래서 신혼을 도둑맞은 뒤에 내 삶의 가치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이 끝난 게 아니라 그렇게 생각했던 나의 챕터 1이 끝났을 뿐이다.
지금은 워라밸이라는 단어가 안 어울리는 회사들만 찾고 있다. ‘여자가 다니기 좋은’ 회사라는 말이 어딘가 듣기 거슬린다. 일에 남녀가 어딨어? 육아에 남녀가 어디 있고? 내가 비로소 결혼으로 완성된 진짜 비혼주의가 되었나 보다.
회사의 성장과 개인의 성장에는 몰입과 열정 그 이상의 희생도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내게는 남편도 아이도 없으니 오히려 내 성장만 생각하는 쪽으로 마음이 바뀐 것이다. (물론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강아지의 유치원비, 병원비를 벌기 위해 일한다는 동기부여도 있고, 동시에 강아지를 위해 재택근무도 자주 한다. 이렇게 바쁜 회사에 다니면서 하루 두 번 산책을 빼먹지 않는 열정적인 보호자가 또 있을까. 자화자찬ㅎㅎ)
살면서 일에 미쳐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 같다. 언젠가 이혼도 꽤 괜찮은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용기를 같이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호사 알아보는 건 여전히 아직이다. 그까짓 이혼과 정상이 아닌 남편보다 나는 회사일이 더 중요하다.
p.s. 기혼이 다니기 힘든 회사에 아무렇지도 않게 잘 다니고 있다는 것만으로 내 가짜 결혼 생활에 힌트가 조금 되려나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