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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연주 Jun 22. 2024

우울증보다 무서운 번아웃 증후군

다 타버린 양초 심지 같았던 날들을 두려워하며


번아웃 증후군은 우울증으로 가는 전초 단계 같다. 이 글을 쓰기에 앞서 번아웃과 우울증의 정확한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인터넷을 꽤나 뒤적거려 봤지만 아직 완벽한 정답은 없는 것 같다. 단지 기회가 된다면 일이 절박한 우울증 환자에게 뜻하지 않게 찾아온 번아웃은 오히려 눈에 가시 같고 또 다른 불안을 야기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1년 넘게 우울증을 앓으면서 그 기간을 단계별로 정리하자면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정신줄을 놓아버린 상태의 초기 3개월, 그 후에 이성으로 감정을 억누르며 우울을 이해해 보려고 애쓰는 3개월이었다. 그때까지 약 효과는 전혀 없었고 그렇다고 약을 크게 증량하지도 않았다. 그때쯤 단기 기억 상실처럼 너무 당연한 것들-내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나 본가 주소-를 까먹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5권 빌리고선 그 가방을 통째로 도서관에 두고 온 날도 있었다.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항상 나를 기다려주는 선생님의 도움으로 약을 바꿔보기도 했고, 심리 상담도 빼먹지 않고 꼬박꼬박 갔다. 하지만 내가 조금씩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건 출근을 하면서부터였다. 물론 우울증을 숨기고 회사 생활을 하는 것도 쉽지만은 않았다. 구태여 힘든 일을 할 필요는 없었다. 의사 선생님이나 상담 선생님 모두 '적당히 쉬운' 아르바이트 같은 소일거리를 추천했었다. 우울에 잠식되어 이불 뒤집어쓰고 누워있기만 하면 무기력이 익숙해져서 나중엔 몸이 고장 난다고 했다.




부끄럽지만 살면서 한 번도 아르바이트를 해보지 않았다. 스무 살에 카페에서 앞치마를 메고 알바를 해보고 싶었다. 라떼 아트를 만드는 바리스타들이 멋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때는 엄마 아빠 둘 다 알바를 반대했다. 세상이 흉흉해서 이상한 사람들이 너한테 번호 물어보기라도 하면 어떡하냐고. 10년도 훨씬 지난 옛날의 작은 꿈에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슬며시 올라왔다. 나이 삼십 대 중반에 알바 경험이 전무한 '알바 시장 무스펙녀'였지만 그래도 밑져야 본전으로 카페 알바를 해보고 싶었다. 적당히 시급을 받으면서 청소를 하거나 설거지를 하고 운이 좋으면 라떼 아트 만드는 법이라도 배우면 좋겠다 싶었다. 우울증을 극복하는데 좋은 시작일 것 같았다.


그러나 내 발걸음은 카페가 아니라 야근 많고 일에 미친 사람들만 다니기로 유명한 모 회사로 향했다. 얼떨결에 지금 회사에서 제안을 받은 뒤로 입사는 일사천리였다. 처음에는 우울증을 잊기 위해 일에 몰두했다. 나도 그들처럼 밤 열두 시까지 일했다.


우울증을 숨기는 것도 큰 에너지를 쓰는 거라서 고장 난 배터리처럼 더 쉽게 지치고 금방 닳았다. 입사 두 달 만에 미니 번아웃이 왔다. 감정이 극도로 사라지고 1주일 내내 회사에서 필요한 말을 제외하곤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약속도 없이 주말에는 잠만 잤다. 우울증이랑은 또 다른 증상이었다. 이미 우울증 걸린 환자도 번아웃이 올 수 있나?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을 것 같지만 어쨌든 암흑 같은 봄이었다.




그리고 이제 장마가 시작되어서야 어렴풋이 알겠다. 내가 일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만큼 번아웃이 두려워서 우울증보다 더 힘들게 발버둥 친 것을. 우울증에서 벗어나고자 일에 의미부여를 잔뜩 한만큼, 내 삶의 의미를 일에서 찾은 만큼, 번아웃을 마주했을 때 대처능력이 없어서 한방에 무너져 내렸다.


지금도 나는 우울증보다 번아웃이 더 두렵다. 도저히 경계심을 바짝 늦출 수 없다. 내 우울이 한방에 사라지지 않는다면 가늘고 길게 적당히 이 우울과 공존하기 위해서 나는 반드시 일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만 한다. 그러니 번아웃을 조심하고자 또 한 번 이직을 결심했다.


새 회사를 다닌 지 고작 3개월도 채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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