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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인생이 큰 인생이라서 그런 거야"

산이 높으면 골도 깊어야 돼.

by 은연주

방금 시어머니와 산책을 하고 들어왔다.

남편이 결혼 2주 만에 이혼을 요구한 지 벌써 반년이 지났고, 우리는 별거 중인 채로 이혼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시어머니와 산책을 했다는 게 남들 입장에선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할 수 있다.


- 남편은 나의 적인가? NO

- 시부모님은 남편의 편인가? YES

- 시부모님은 나의 편인가? YES

- 시부모님은 나의 적인가? NO

- 나는 이혼을 할 것인가? YES


이 말 같지도 않은 상황이 아무도 믿기지 않겠지만 나조차도 이해하는데 반년이나 걸렸다. 사실 머리로만 겨우 이해할 뿐 마음은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다. 그간 흘린 눈물과 상처로 얼룩진 마음이 이혼을 한다고 없었던 일처럼 짠! 하고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시간이 많이 지나도 상처는 흉터로 남을 것이다. 내가 다시 마음을 열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이 생길지, 그렇다면 그게 얼마나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 평생 남을 믿지 못하고 혼자 살 수도 있다.




결혼하고 보름 뒤에 시어머니께서 남편에게 심부름을 시키셨다. 남편은 엄마에게 짜증을 내며 싫다고 거절했다. 그래서 시어머니는 내게 대신 부탁하셨다. 나는 당연히 시어머니의 심부름이니깐 군말 않고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은 본인이 분명 싫다고 한걸 알면서도 둘이 뒤에서 자기를 속인 거라고 화를 냈다. 배신감이 든다고, 이제는 너와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대뜸 이혼을 통보했다.


이렇게 갑자기 급발진을 한다고? 하늘이 뒤집히는 것처럼 갑작스러웠다. 혹시 남편이 패륜아인가? 그랬으면 내가 결혼은커녕 연애, 아니 상종도 안 했겠지. 시어머니의 심부름이 불법적이거나 심각한 일이었나? 심부름은 시동생의 짐을 좀 전달해 주라는 것뿐이었다.




남편은 2년간의 연애 시절, 감정 표현엔 서툴러도 늘 한결같이 나를 진심으로 위해주는 사람이었다.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본인만의 정해진 생활 패턴을 준수하는 사람이었다. 융통성이 조금 부족하긴 했지만 대신 법 없이도 살 것 같은 사람이었다.


내가 부탁하지 않아도 항상 퇴근길에 데리러 왔다. 내가 회사에서 까이고 와서 축 처진 날이면 나를 위로해 주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걸 아는 사람이었다.


“산책할까? 집에 오는 길에 아이스크림 사 먹자. 너 좋아하는 옥동자."


사고방식이나 성격은 정반대였지만 우리 둘 다 좋아하는 게 똑같았다. 자연을 사랑하고 모험심 가득해서 2년 내내 큰 싸움 없이 캠핑을 다녔던 우리. 둘 다 요리를 좋아해서 부엌에서 같이 사부작사부작 요리해 먹는 재미를 느꼈다.


이렇게 평생 재밌게 살 수 있겠다. 이런 사람이라면 결혼해도 되겠다. 그런 생각이 들 때쯤 남편은 내게 깜짝 프러포즈를 했고, 그렇게 우리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남편이 결혼 후 2주 만에 돌변한 사건, 나는 그때 남편에게서 매우 낯선 모습을 봤다. 초점 없이 텅 빈 눈동자. 분명 나와 대화를 하고 있지만 상호작용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내 말을, 내 심정을 이해하고 공감하기는커녕 전혀 입력되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순간 '아스퍼거인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안 그래도 남편은 논리적이고 기계를 잘 다루며 전형적인 엔지니어 같아서 내가 평소에도 종종 로봇 같다고 말했다.


놀란 시부모님께서 우리가 사는 나라로 급히 들어오셨지만, 남편은 자기 부모 앞에서도 완고했다. 이혼을 하겠다는 그의 강박적 사고는 변하지 않았다. 시부모님이 남편을 아무리 다그치고 달래 보고 설득하고 회유할수록 그의 이혼을 해야만 하는 이유는 점점 더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으로 변해갔다.


연애 시절에는 내가 앞으로도 계속 일할 거라고 했으면서 결혼하자마자 취업도 안 하고 게을러졌다는 둥. 나는 남편 때문에 회사까지 그만두고 외국에 따라갔는데, 심지어 간 지 보름밖에 안 된 나에게 취업을 운운했다. 한국에서 보낸 우리 신혼 이삿짐 컨테이너가 아직 도착하기도 전이었다.




남편은 절대 자신의 결정을 바꾸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에 내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투명인간 취급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마주한 이 상황이 도무지 상식적으로 소화가 되지 않았다. 심각한 충격을 받고 공황발작이 왔다. 난생처음 겪어본 공황장애.


시부모님은 나를 가족도 친구도 없는 외국에 내버려 두면 큰일 날 것 같다며 한국으로 데리고 들어오셨다. 그러자 남편은 법적인 이유를 들먹였다. "배우자의 일방적 가출, 유기는 법적 이혼 소송 사유에 해당하며..."




한국에 들어와서 우선 정신과부터 찾았다. 나의 이야기를 들은 의사는 이미 남편을 진료한 적이 있었는데, 내 이야기까지 듣고 짐작컨대 남편은 고기능 자폐 스펙트럼이 의심된다고 했다. 그리고 남편의 2차 증상은 편집증과 강박증, 우울증. 편집증은 피해의식, 피해망상까지 이어진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의 반응은 "웬 자폐요? 제 남편 똑똑하고 평범한 사람인데"


"네 근데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그런 자폐 말고, 머리는 좋아도 사회적 커뮤니케이션, 상호작용이 안 되는 거죠. 옛날엔 아스퍼거라고 불렀는데 증상이 너무 다양해서 이제는 자폐 스펙트럼(ASD)으로 바뀌었어요."


아, 내가 그날 그 순간 문득 아스퍼거를 떠올렸던 게 맞았다니. 어디서 어쭙잖게 아스퍼거라는 단어는 들어봤지만 정작 그게 정확히 뭔지, 아스퍼거가 고기능 자폐 스펙트럼인 줄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아니 근데 어떻게 연애를 멀쩡히 해요? 남편이 저를 속였나요? 저 지금 사기결혼 당한 거예요?"

더 납득이 되지 않았다. 결혼식날 드레스 입은 나를 보고 눈물을 흘린 남편이,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프러포즈를 했던 남편이 나를 속였다고?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팔자가 사납나? 내 인생이 저주받았나? 내가 뭘 잘못했지? 그동안 내가 놓친 게 있었나? 계속 나를 자책하면서 좀먹어갔다. 우리가 결혼 전 커플 상담을 받았을 때, 자존감 높고 안정애착이라고 나왔던 내가 정말 완벽하게 무너졌다. 자존감은커녕 아예 자아 실체 자체가 없어졌다. 그저 껍데기만 있는 산 송장일 뿐이었다.




그 무렵 아빠 앞에서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냐고,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긴 거냐고 통곡한 적이 있다.

아빠는 한참 침묵을 지키다 침착하게 대답하셨다.


"네가 높은 산 같은 아이라서 그래. 네 인생이 큰 인생이라서 그런 거야. 산이 높으면 골도 깊어야 돼."


나는 그 말이 당연히 이해되지 않아서 꺼이꺼이 울면서 겨우 대답을 이어나갔다.


"나는 작은 인생 살고 싶어. 누가 큰 인생 산대? 그냥 작게 조용히 살고 싶어."


"아니야, 아빠 말이 이해가 될 날이 올 거야. 힘든 일은 언제든지 어떤 형태로든 누구에게나 찾아와. 지금 일찍 힘든 일을 겪은 게 어쩌면 네가 더 큰 산 같이 깊은 사람이 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어."




사람들과 연락을 다 끊었으니 아무도 내가 한국에 있는지 몰랐다. 가끔 누가 잘 지내냐고, 거기는 어떻냐고 물어보면 그 나라에 있는 척 답장을 했다. 나는 내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그럴수록 스스로 우울에 더 깊이 빠져들면서 점점 삶의 의지도 잃어갔다.


하지만 행복도 내가 만드는 것이고 불행도 내가 만드는 것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이 조금씩 스며들어왔다.

힘든 일이 일어난 것은 맞지만 그걸 계속 슬프다, 아프다, 괴롭다고 질질 짜고 가져가는 건 내 선택이고 집착이구나. 이게 말로는 참 쉬운데 머리로도 이해는 되지만 생각을 내 마음처럼 쉽게 떨쳐낼 순 없었다.




그때 내게 도움이 된 건 자폐 스펙트럼과 심리에 관한 여러 책이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혼을 결심했지만, 남편에 대한 증오나 남 탓 같은 부정적인 감정 대신 남편이라는 사람을 책으로 공부하며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매일 도서관에 가서 하루에 한 권씩 책을 읽어댔다.


여전히 나는 내 마음을 더 보듬어줘야 한다. 마음의 상처를 다 치료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그렇다고 원망이나 미움 같은 나쁜 감정을 굳이 내 안에 갖고 있고 싶진 않다. 그랬더니 요즘은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는다. 하도 울어서 눈물이 마른 걸 수도 있다. 최근에 바꾼 우울증 약이 나랑 유독 잘 맞아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사실 이유는 뭐가 됐든 중요하지 않다.


내 아픔에 빠져서 허우적대다가 잠시 빠져나와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니, 주변의 다른 사람들의 마음도 조금씩 더 잘 보이기 시작했다. 이게 상실의 아픔을 겪어본 자가 다른 사람의 슬픔을 진정으로 위로할 줄 아는 연대의 힘일까?




나는 지금도 남편이 밉지 않다. 물론 너무 깊게 파인 상처 때문에 내 감정이 시시때때로 오르락내리락한다. 남편을 죽여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시댁까지 싸잡아서 고소하고 전국에 소문을 내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건 상처받은 내 마음의 소리일 뿐이다. 정신줄을 붙잡고 침착하게 생각해 보면, 병식이 없는 채로 평생 가면을 쓰고 힘들게 살아오느라 상처가 많은 남편이 안타깝다. 자기감정을 인지하지 못하는 그에게 연민을 가진다.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어머니, 아버지에게서 사랑을 느낀다.


아빠 말대로 나는 지금 높은 산이 되기 위해 깊은 골짜기를 지나고 있는 중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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