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가 생긴 날
오늘 낮에 면접을 봤다.
내가 직접 지원한 게 아니라 회사에서 먼저 나를 불러주었으니 그것은 마치 전래 동화 '해님달님' 속 동아줄이 내려온 것 같았다. 면접 분위기는 좋았다. 물론 분위기가 좋았다고 결과가 좋다는 법도 없지. 그렇게 기대하다가 떨어진 면접이 어디 한 두 번인가. 하지만 결과를 떠나서 오늘 면접은 지옥의 소용돌이에서 날 꺼내줄 '동아줄'과도 같았다.
내가 다시 구직자가 된 지 얼마나 됐다고 세어야 할까.
회사를 그만둔 시점부터 세면 10개월째, 한국에 돌아온 시점부터 따지면 4개월째 무직 백수.
나는 10개월 전 결혼 때문에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둬야 했다. 전업주부가 꿈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결혼을 해서' 그만둔 건 아니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해외 발령으로 인해 결혼하자마자 외국에서 살게 되었으니 '결혼 때문에' 그만둔 게 맞다.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지만 어쨌든 남편 때문에 그만뒀다.
하지만 원래 인생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적 나열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던가.
결혼식을 올린 지 딱 한 달째, 내가 남편 사는 나라로 이민 가방 끌고 간 지 보름 만에 남편이 돌변했다.
남편은 내가 시어머니의 작은 심부름을 했다는 걸 알게 되자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이성을 잃었다. 분노를 터뜨리며 일방적으로 이혼을 입에 올렸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따라갈 수 없는 감정선이었다. 남편은 내게 신뢰가 깨졌다고, 결혼이 후회된다며 이혼을 요구했다. 나는 시어머니가 시킨 심부름을 한 게 전부인데 신뢰가 깨졌다고? 만약 연애 시절 싸울 때마다 습관적으로 헤어지자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남자였다면 이렇게 충격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툭하면 이별을 꺼내는 사람과 결혼은커녕 애초에 연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편의 원가족, 그러니깐 나의 시댁은 겉으로 보나 안으로 보나 평범한 가족이었다. 콩가루 집안도 아니고 기구한 사연이 있지도 않다. 오히려 시부모님은 내가 엄마 아빠만큼 존경하고 좋아하는 분들이다. 우리 엄마 아빠는 남편보다도 특히 시부모님의 인품을 보고 결혼을 허락하셨다.
내가 시어머니의 심부름을 했다고 남편이 이혼을 말하는 건 어떤 상황에서도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다. 우리는 2년 정도 연애를 했다. 연애 3개월 만에 급하게 한 결혼이었다면 그 순간 후회를 했을 텐데, 내 머릿속엔 물음표 백만 개밖에 없었다. 결혼 준비를 하는 1년은 양가 부모님 허락 하에 신혼집에서 같이 살았다. 나는 남편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은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변했다. 결혼식을 추억할 겨를도 없었고 외국 생활에 적응하기도 전이었다. 그는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결혼한 남자가 아니었다. 나는 남편 하나 믿고 따라간 낯선 외국에서 갑자기 영문도 모른 채 혼자가 되어버렸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남편의 행동을 이해해 보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남편의 화가 가라앉지 않을까 기다렸다. 그러나 현실은 한 지붕 아래서 나를 철저하게 투명인간 취급하는 남편. 그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고 내가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우리 사이의 공기는 차갑고 무거워서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나는 그렇게 소리 없이 서서히 무너져 내려갔다.
시어머니 심부름이 발단이었으니 당연히 시부모님도 이 상황을 알게 되셨다. 시부모님은 이러다 애 하나 죽겠다고 우리가 있는 나라로 직접 날아오셨다. 나는 일단 시부모님 손에 끌려서 다시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정신과 치료와 심리상담.
남편과의 추억이 가득한 한국에 있는 것조차 너무 힘들어서 이 나라 저 나라 떠돌듯이 도망도 쳐봤다. 깊은 산속 절에 들어가서 지내기도 했다.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어서 20만 원이나 내고 사주도 봤다. 그래도 나날이 계속 죽어갔다.
영혼이 살해된 기분.
내가 3년간 만나며 사랑을 나눈 사람은 누구지? 내가 영원을 약속하고 결혼한 사람은 누구지? 내 남편은 누구지? 끝없는 질문의 끝은 언제나 다시 나로 돌아왔다. 아..... 나는 누구지? 그렇게 나를 잃어버렸다.
남편은 여전히 이혼을 주장하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본인만의 이유가 더 탄탄해져서 나를 괴롭힌다. 최근에는 내게 이혼 소송을 걸었다. 나는 완벽하게 망가졌고 도저히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주변에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모든 어른들에게 물어봤다. 정신과 의사도 심리상담사도 시부모님도 나의 부모님도 모두가 그랬다. 시간이 약이라고.
그렇지만 그 시간이 다 흘러가기 전에 내가 먼저 우울에 집어삼켜지면 어떡해? 어떻게든 낫고 싶다는 생각에 1주일씩, 2주일씩 시간을 다시 죽이러 비행기에 몸을 자꾸 싣었다. 그래봤자 나아지고 있다는 착각은 잠시였다. 이 억겁의 끝엔 어떤 것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죽음?
그때 동아줄이 내려왔다.
"안녕하세요 OOO님, ***포지션 제안 드립니다"
그렇게 오늘 면접을 보고 왔다. 솔직히 면접 결과는 어떻든 중요하지 않다. 이제 조금씩 올라가 보자. 너무 깊게 내려온 만큼 아직 올라갈 길이 멀지만, 매일 조금씩 글을 쓰다 보면 어느새 다시 땅 위에 두 발 딛고 설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