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댈 곳 하나 없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사실 나는 어딘가에 기대고 있었다.
스님,
어떤 인연으로 이렇게 화엄사에 흘러들어와 벌써 1주일의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혼자 운전해서 화엄사에 내려오던 첫날이 생각납니다.
4시간 동안 운전하면서 어떤 특별한 생각이 들었던 건 아니지만 대체로 무겁고 힘든 마음이었어요.
억지로 신나는 음악을 틀어놔도 차 안의 공기에 질식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자꾸만 휴게소에 들러 심호흡을 해야 했어요.
태풍 속에 도착한 화엄사는 이미 오후 5시가 넘어 너무 늦은 건 아닐까 걱정도 되고, 스님과 전화 연결이 바로 닿지 않아 30분 정도 툇마루에 앉아 멍 때렸어요. 그렇게 앉아 있으니 찰나에 많은 생각이 스치더라고요.
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님 따라 처음 왔던 화엄사-보제루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아직도 집에 있어요-
또 5년 전 친구와 지리산 배낭여행을 하며 들렀을 때의 화엄사.
그리고 지금 화엄사에 다시 온 이유에 대해 쭉 생각해 보니 현재의 내가 너무 불쌍하고 측은해서 마음이 쓰라렸어요. 자기 연민은 항상 제가 제일 멀리하고자 하는 감정인데도요. 앞선 기억들은 모두 좋은 추억인데, 어째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겼는지. 내 집이라고 부를 곳 하나 없이 화엄사까지 쫓기듯 내려오게 되었는지.
첫 이틀은 잠만 잤어요. 병원에서 준 약이 세서 그런지, 약을 처음 먹어봐서 적응하는 과정인 건지 혹은 그저 도망치고 싶은 마음인 건지 일어나지도 않고 잠만 잤어요. 그 누구와도 말하지 않고, 눈도 마주치지 않고 밥때 되면 겨우 밥이나 먹고 다시 드러눕기만 했는데, 스님이 늦은 밤 슬며시 방문 앞에 놓고 가신 커피와 빵을 보고 괜히 눈물이 났어요. 누군가 이렇게 날 챙겨주고 있구나, 난 혼자가 아니구나.
스님 덕분에 화엄사에서의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 것 같아요. 절에 이렇게 젊은 스님이 계실 줄 몰랐는데, 아무래도 나이대가 비슷해서 저도 더 편하게 마음을 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스님의 따스한 다정함과 배려심에 점점 기대다 보니 어느새 예전의 저로 조금 돌아온 것만 같았어요.
제 오래된 소망이었던 천왕봉 고생길을 함께 걸어주어서 감사해요. 스님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힘을 낼 수 있었어요.
이렇게 인연이 닿아, 마음이 무너진 시기에 절에서 잠시 머물다 갈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복 받은 사람이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제 마음을 더 관찰해 가며 부처님의 말씀을 공부해 볼게요.
108배도 열심히 하려고요. 이게 다 모두 스님 덕분입니다. 스님이 주신 불교성전, 108 염주, 사프란.. 선물들 모두 너무 감사하지만 역시 제게는 스님과의 인연이 가장 큰 선물이고 기적인 것 같아요.
주지 스님께서 해주신 좋은 말씀들과 스님의 예쁜 마음씨 기억하면서 조금씩 정신 차리고 씩씩하게 지내볼게요. 또래 보살이 없어서 혹시라도 심심할 스님을 위해 제가 빠른 시일 내에 다시 화엄사를 찾아올게요.
그때는 우리 덜 힘든 코스로 등산하고 꼭 옥천귀뚜라미도 가요.
마음이 죽은 기분이었는데 부처님의 자비로 이렇게 편지 한 줄 쓸 힘을 얻은 것 같습니다.
스님 조만간 다시 만날 때까지 항상 건강하게 즐겁게 지내세요.
2023년 8월 어느 날
한국에 돌아온 후 마음을 기댈 곳이 전혀 없었다. 가족을 제외한 주변 누구에게도 내가 한국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지인들에게 나는 이제 막 결혼해서 따끈따끈한 신혼, 그것도 신혼 생활을 외국에서 둘이 보낸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엄마, 아빠 그리고 시부모님 모두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셨지만 오히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것조차 부담스럽고 힘겨웠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장성한 자식을 결혼시킨 사실에 너무 행복해하셨는데.
우리 가족도, 남편의 가족도 새로운 식구를 맞이한 것을 정말 기뻐했다.
그건 내가 부모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아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우리 엄마, 아빠가 내 앞에서 이렇게까지 깊은 감정을 내비친 적이 있던가? 결혼식날 엄마, 아빠를 보며 들었던 생각이 여전히 생생하다. 자식을 키워 보지 않았으니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결코 나를 키우는 게 쉽진 않았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자타공인 말썽 안 부리고 잘 자란 K장녀임에도 불구하고, 당신들도 엄마 아빠라는 역할은 처음일 테니깐.
나 역시 결혼식의 설렘, 이제 진짜 시작이라는 결의, 결혼을 축하해 준 친구들의 고마움 등을 곱씹을 새도 없이 이런 일이 터졌는데, 부모님들은 오죽했을까. 자식이 조용히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마음이 찢어졌을까. 이 상황이 얼마나 황당했을까.
나의 장점이자 단점은 높은 공감 능력이다. 나는 나의 아픔을 오롯이 아파하기도 전에 부모님의 아픔부터 살피느라 배터리가 더 빠르게 닳았다. 엄마, 아빠는 행여나 내가 너무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 봐 말 한마디 건넬 때도 고심하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부모님을 보기가 싫었다. 미안했다. 그리고 스스로도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이 상황을 이해해 보려고 애쓰느라 시선을 세상 바깥으로 돌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동떨어진 곳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산을 가까이하고 절을 좋아해서 종종 쉼이 필요할 때면 템플스테이를 가곤 했다. 대부분의 템플스테이는 1박 내지는 2박의 짧은 스테이만 가능하다.
절에서 오래 머물려면 개인적으로 연이 닿은 스님이 있어야 하는데, 아빠는 따로 연이 깊은 스님은 없다고 해서 시어머니께 부탁드렸다. 그렇게 시어머니를 통해서 지리산 화엄사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1주일 넘게 신세를 졌다. 하루종일 공양간에 얼씬도 않고 잠만 잔 날도 있고, 아무와도 말 한마디 안 한 날은 더 많았다. 그래도 어떤 날은 또 기운을 내서 보살님들 도와 제사 준비도 하고 허드렛일을 했다. 스님과 차담을 하거나 함께 읍내로 놀러 나가기도 했다. 또 그러다 다시 혼자 지리산 계곡물에 발 담그고 앉아 조용히 울기도 했다.
내가 누군지, 왜 왔는지 묻지도 않고 기꺼이 객에게 방 한 칸을 내어준 절.
젊은 스님과 연이 닿아 지금은 법륜 스님이 이끄시는 정토회 불교 대학에 다니고 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아프고 괴롭다. 즉문즉설을 듣고 불교 대학에 다닌다고 상처가 없어지진 않는다.
다시 취업을 해야 하고 이혼도 해야 하지만 그런 모든 일들을 수행해 나가기엔 동력이 부족하다.
속으로 삼킨 눈물이 넘쳐 그만 뇌에 녹이 슬었나. 아니면 마음이 산산조각 나면서 근육에 생채기가 났나.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지금 내 마음이 어떤지 들여다보는 방법을 조금은 알게 된 것 같다.
그건 내게 조용히 커피와 빵을 건넨 젊은 스님의 눈동자에 담겨 있었고, 땀이 아니라 눈물로 방석을 적시며 108배를 할 때 나를 조용히 내려다본 각황전 불상의 미소에 담겨 있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오늘 병원에서 상담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스님에게 문자를 보냈다.
-스님 잘 지내요?
-웬일이에요!
-그냥~~ 스님 내 친구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