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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연주 Jan 26. 2024

딱 손톱만큼

빠르게, 느리게


아침에 문득 손톱을 자르다가 손톱 자라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삼 계절의 변화도 무섭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회의를 하다가 창밖에 하늘이 밝아서 시간을 봤는데 이미 오후 다섯 시가 한참 지나있었다. 원래 겨울에는 네시쯤이면 어둑어둑해졌는데 해가 며칠 전보다 조금은 길어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 겨울이 지나면 곧 결혼 1주년 기념일이라는 사실에 억울함이 또 울컥 올라왔다. 전혀 기념하고 싶지 않은 기념일. 늘 놀 생각뿐이라 매년 결혼기념일마다 어디 놀러 갈지 미리 생각해 뒀던 내가 우습게 느껴졌다.




남편이 이상해진 그날 이후로 나는 손톱을 몇 번이나 잘랐을까. 손톱 자르는 주기만큼 다른 많은 것들을 꽤 자주 해냈다. 상담을 1주일에 두 번씩 받은 적도 있고, 병원을 1주일에 세 번 간 적도 있다. 마음 둘 곳이 없어서 인천공항을 밥먹듯이 간 적도 있다. 비행기를 타고 한국을 도망치듯 빠져나가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손톱이 자라는 속도만큼 시간은 빨리 지나갔는데 내 아픔도 딱 손톱만큼만 괜찮아진 것 같다. 아니 하나도 안 괜찮아졌을 수도 있다. 어제는 이유 없이 속이 울렁거리더니 토를 했다. 음식을 잘못 먹은 것도 없었다. 갑자기 모든 것들이 역겹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친구에게 너무 태연하게 그 나라에서 취업이 안되어서 우울증 때문에 돌아왔다고, 이직했다고 기쁜 소식이라도 전하는 듯 말하는 내가 역겨웠다. 누구보다 날 위해주는 다른 친구가 남편의 행동이 너무하다고 어쩜 그럴 수 있냐고 내게 공감을 표했을 때 나는 오히려 속으로 화가 났다. 나는 아직도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데 너는 어쩜 그렇게 공감을 잘해?


손톱을 몇 번이나 자르는 동안 내 상처는 딱 손톱만큼만 나아졌다. 세상의 속도는 손톱만큼 빠르고 또 손톱만큼 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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