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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연주 Jan 24. 2024

"나는 원래 이거 못해"의 함정

아니,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거잖아.

데이터, 숫자에 원체 약한 나는 가공된 시트만 만지고 쓸 줄은 알아도 설계 같은 건 막막하게 느껴졌다. 엑셀의 무궁무진한 확장성이야 익히 알고 있지만 정작 나는 엑셀의 10% 정도만 활용할 줄 알았다. IT회사에 다니긴 해도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데이터 애널리스트, 개발자 같은 엔지니어 직군들은 마치 이방인도 아닌 외계인처럼 느껴지곤 했다.


나는 좋아하는 건 좋아하니깐 더 잘하게 되고, 싫어하는 건 싫어하니깐 아예 손 놓아버리는 성격이었다. 당연히 문과 중에 문과라서 "수학 과학 싫어"를 외치며 일찌감치 수포자의 길을 걸었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 수학을 실제로 포기했던 건 아니지만, 수능이 끝나자마자 사칙연산 이후의 모든 수학을 뇌에서 지워버린 걸 보면 수학을 참 어지간히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팀의 리더는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분이라서 내가 못하는 걸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안 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업무를 하기 위해 아주 간단한 서베이를 돌리는데, 그 옛날 대학 시절 통계 수업의 울렁증이 올라왔다. 신기하게도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싫어하는 걸 마주하니 거부반응이 일어난 것이다. 리더의 도움을 받아서 어떻게 서베이를 하긴 했는데, 이제 데이터를 정리하는 것에서 또 막막해졌다. 여기저기 흩어진 로우데이터를 어떻게 가공할지 모르겠어서 순간 욱하는 마음에 퇴사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포기하면 나는 발전 없이 제자리에 있겠지. 지기 싫었다. 꼭 내 손으로 해보겠다는 의지를 가졌다. 그렇게 도와달라고 요청했더니 팀장님은 친절하게 1:1 과외를 해주셨다.  


물론 이전에도 업무 할 때마다 그때그때 필요한 엑셀 기본적인 함수나 브이룩업 같은 스킬은 할 줄 알아서 일에 딱히 지장은 없었다. 가끔 기억이 안 나면 네이버를 찾아가며 하면 됐다. 하지만 내 뇌는 엑셀이 아니라 도화지처럼 생겼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타고난 걸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못하는 것도 포기하지 않고 해 보겠다는 마음, 그리고 지금보다 더 나아지고 싶다는 의지. 이렇게 하다 보면 내 사고회로의 1% 정도는 엑셀의 셀 1칸처럼 변하지 않을까?




가만 보면 이 세상에 노력해서 안 되는 거 하나 없다는 말은 맞는 것 같다. 꼰대처럼 노오오오력 타령을 하는 게 아니다.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걸 못한다고 둘러 말하는 악습에 대해서 말하는 거다. 나에게도 있는 나쁜 태도, 사람들이 쉽게 갖다 붙이는 그 핑계말이다.


바꿔 말하면 남편은 내게 노력할 의지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도 할 수 있는데 하기 싫어서 안 했다는 뜻이다. 남편은 진단명과 상관없이 자기가 결정하고 주도한 이 결혼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그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연애 내내 보여준 책임감 있는 모습에 결혼을 결심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진짜 모습은 비겁한 행동으로 점철된 미성숙한 자아라는 사실에 큰 배신감과 상실감을 느낀다.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한 건 어쩔 수 없다. 사실 남편이 치료를 받으면 좋아지겠지, 기다리면 좋아지겠지 이런 생각으로 희망회로를 돌렸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본인의 치료와 별개로 이혼을 주장한다. 그 이유도 매우 단순하다. “노력하기 싫어서”. 그러니 나는 정말 사기결혼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나를 사랑한 적이 없다. 그도 나를 사랑했을 것이라고 수도 없이 생각하고 믿었다. 아니 지금도 그렇게 믿고만 싶다. 하지만 그가 말했던 사랑은 자기만 받는 사랑이었다. 아무리 내가 시어머니의 심부름을 했다는 것에 남편 자기 나름의 큰 상처와 배신감이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의 당위성을 일단 차치하고) 남편이 나를 정말 사랑했다면, 그가 제대로 된 사랑이 뭔지 알았다면 그는 절대 이러면 안 됐다.




이 글을 쓰고 나는 다시 마저 데이터와 씨름을 하러 갈 것이다. 나는 남편이랑 다르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그게 비록 내가 못하고 싫어하는 일이어도 말이다. 아주 조금씩, 느려도 좋으니 매일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이다.


오늘도 내 퇴근은 아직 한참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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