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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연주 Jan 23. 2024

그의 허상을 사랑했어요.

야근 중에 나를 울린 플레이리스트


알고리즘이 나를 이곳으로 데려다 놓았다.


나는 여전히 아이폰이 갑자기 띄워놓는 추억 속의 우리 모습이 너무 슬프다. 매일 저녁 같이 야식을 해 먹고 강아지 산책을 다니던 내 일상이 그립다. 함께 하나씩 사 모았던 캠핑용품이 가슴 아프다. 아직도 작은 방에 이삿짐 박스들을 쌓아두고 방문을 걸어 잠갔다. 요즘도 약을 먹어도 꿈에 자꾸 남편이 나온다. 하기사 약은 잠을 잘 수 있게 만들어주는 약이지, 꿈을 안 꾸게 하는 약도 아니고 남편이 그 꿈에 안 나오게 하는 약도 아닌데.


시계는 뒤로 가지 않는 법인데 나는 계속 그 자리에 머물고 있으니 마치 나만 시간을 거슬러 가는 것 같았다. 문득 달력 속의 24년이라는 숫자가 너무 낯선 세계처럼 생경하게 느껴졌다. 23년을 건너뛰고 내 몸의 세포들이 21년, 22년을 세세하게 기억할수록 나의 정신은 나날이 파괴되는 것 같았다.




나는 왜 이토록 슬퍼하고 아파하나. 이만하면 시간이 꽤 지난 것도 같은데 여전히 울컥울컥 눈물이 터지고 가슴 정중앙이 꽉 막히듯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내가 눈물을 많이 흘릴수록 그의 죄는 더 무거워지는데. 한때는 사랑했던 사람을 중죄인으로 만드는 것은 전혀 즐겁지 않은 일이다. 그를 미워하지만 미워하고 싶지 않다. 물론 나는 남편을 보고 싶은 마음도 없고, 다시 잘해보고 싶은 마음도 없다. 손뼉도 맞아야 박수 소리가 나는 법인데 애초에 이런 감정의 널뛰기는 오롯이 나만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내 영혼을 푹 찌르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실체가 없는 사람과 이혼을 다투며 해결해야 된다는 현실은 내게 너무 버겁다. 차라리 결혼 전 시아버지가 보셨다던 사주처럼 우리 둘 중 하나가 죽으면 이혼보단 사별이 더 쉬울 텐데. 그래서 죽고 싶었다. 일이 터지고 매일같이 그 생각을 했다. 결혼하면 둘 중 하나가 죽는다는 게 내가 영혼 살해 당한다는 뜻이었구나.




“오빠 들려? 내 마음이 하늘에 가서 닿는다면 나는 오빠의 영원한 불행을 빌 거야. 내가 사랑했던 허상이 계속해서 허상으로 남을 수 있도록 말이야. 나를 이렇게 죽여놓고 오빠 너만 갱생해서 새 삶을 사는 걸 원치 않아. 그러니 꼭 그 마음 절대 변치 말아 줘. 내가 사랑했던 그 남자는 허상이었다는 사실을 부디 지켜줘.”


오늘의 나는 울화가 많아서 괴롭다.

고통 없이 죽고 싶다. 죽는 게 무서워서 더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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