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BD Eunyeonjoo
세상에서 제일 감흥 없는 생일날 아침. 미역국도 없고 가족도 없는 하루였다. 남편은 며칠 전 한국에 들어왔지만 당연히 남보다 못한 그는 내 생일은커녕 내 존재 자체를 잊었을 것이다. 엄마 아빠는 태국 치앙마이에 여행을 갔다. 그리고 동생1은 제주도에, 동생2는 일본에 있다. 하필 내 생일을 끼고 가족 모두가 각자 여행을 갔다. 3X살이 되어보니 이제 생일은 더 이상 별 게 아니긴 하다. 나도 회사만 아니었으면 차라리 생일이고 나발이고 어디 훌쩍 여행을 떠났을 텐데, 회사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생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지인들에게 축하 연락이 오면 괜히 반갑고 또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웠다. 양가감정의 중간 지점에서 어쩔 줄을 몰랐다.
나는 남편 생일에 매년 깜짝 파티를 해줘서 남편을 울렸다. 상대방을 감동시키는 건 내 특기라서 항상 자신 있었다. 하지만 남편은 내 생일에 의무적으로 돈을 쓸 뿐이지 따로 나를 감동시키는 재주는 없었다. 내 쿠팡 아이디를 빌려서 생일 전날 로켓배송으로 맥북을 주문했던 사람이었다. 너무하다 싶다가도 원래 이런 남자인 걸 알아서 이 사람한테는 너무한 게 아니었다.
오늘 낮에는 시어머니가 오셔서 점심을 사주셨다. 생일인데 친구들이랑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용돈도 주셨다. 그리고 집에 와서 눈에 계속 밟히던 유기견 입양 신청서를 제출했다. 생일을 기념하여 강아지에게 내 사랑을 퍼주고 싶었다. 결혼하자마자 남편의 인생에서 축출당한 여자와 주인으로부터 버려진 강아지. 우리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것 같다. 부디 내게 입양 인터뷰 기회가 주어지길.
그리고 저녁에는 고등학교 시절 제일 친한 친구들이 또 우리 집을 찾아줬다. 역시 그녀들도 케이크를 들고 왔는데, 센스 있게도 레터링에 '은연주'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우리 집에 온 손님들을 위해 내 생일상을 내 손으로 직접 차렸다. 물론 전부 다 배달음식. 파스타를 시키고 떡볶이와 순대도 먹었다. 아직 마땅한 식기도 조리도구도 소금 후추도 없어서 요리를 할 수 없다는 핑계였다. 나는 신혼살림으로 마련했던 새 식기와 조리도구들이 아까워서 새로 사지도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마치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 내 이혼 과정 같다. 우리는 멀쩡한 식탁을 내버려두고 방바닥에 배달음식을 늘어놓은 채 넷플릭스를 봤다. 지금 냉장고에는 한 입씩 맛본 케이크만 3개가 있다. 며칠간 케이크로 배 채워도 충분할 것 같다.
아참, 오늘은 그냥 일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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