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받고선 일면식 없는 행인에게 위로를 받는다.
모든 상처는 이야기를 품고 있다. 내 몸에 있는 몇 개의 흉터들은 살아온 지난날을 말해준다. 눈에 띄는 상처 중 제일 큰 건 무릎에 있는 흉터다. 남편과 연애 초기에 섬으로 놀러 갔다가 교통사고가 크게 나서 무릎 수술을 받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양경찰청 구조선을 타봤고 119구급차에 실려갔다. 살면서 맹장이 터지거나 고열로 응급실에 몇 번 가봤어도 권역외상센터를 가보기는 또 처음이었다. 그때는 제대로 걷지도 못했던 두 달이 그렇게 힘들었다. 정신적으로도 많이 예민해지고 약해졌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제는 흉터를 봐도 아무렇지도 않다.
교통사고 가해자는 불법 개조된 차를 면허도 없이 운전한 사람이었다. 남자는 나한테 사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부분 교통사고 가해자들은 처벌을 피하기 위해 어떻게든 합의를 보려고 한다는데, 그 사람은 내게 합의는커녕 사과도 하지 않았다. 경찰 조사에서 자기는 빨간 줄 생겨도 상관없다고 말해서 담당 형사가 나한테 이 새끼는 무조건 형사 처벌받게 될 거니깐, 꼭 민사까지 같이 하라고 말할 정도였다. 나는 합의금을 받고 싶은 게 아니라 사과를 받고 싶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인간의 심리 아닌가? 미안하면 미안함을 느끼고, 고마우면 고마움을 느끼는 것. 합의 의사 없는 쪽이 피해자인 내가 아니라 가해자라는 사실이 웃기지만 어쨌든 형사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해자는 교통사고특례법 치상죄로 재판까지 가게 되었다. 형사 재판이라서 내가 뭘 딱히 할 일은 없었다. 대신 변호사 친구의 도움을 받아서 엄벌탄원서를 여러 장 보냈다.
가해자는 재판이 시작되고 법원에 출석을 해서야 나한테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자기는 남들도 많이 돕고 착하게 살아왔는데, 갑자기 다친 너 때문에 억울하게 법원을 다닌다고. 요즘 스트레스받아서 잠이 안 온다고 내 탓을 했다. 나는 그 카톡을 받고 화가 나지도 않았고 황당하지도 않았다. 수술 때문에 두 달 동안 출근을 못해서 생계에 타격을 입었고, 합의금도 없었으니 내 돈으로 모든 치료비를 부담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나한테는 경제력도 있고 고결한 자아도 있으니깐. 남자는 법정에서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나는 그 남자에게 따로 민사소송을 걸지 않았다. 어이가 없기는 했지만 평생 흉터를 갖고 살아야 하는 게 원망스럽거나 억울하지 않았다. 대신 무릎의 흉터를 볼 때마다 지금도 생각한다. 사람이 사람이기를 포기하면 얼마나 추악해지는지를. 사람이 사람다운 건 수치심을 느끼고 자아 성찰을 할 줄 알아서라는 사실을.
몸의 상처는 눈에 보이니깐 저절로 낫는 게 보여서 견딜만했다. 하지만 마음속 상처는 눈에 보이지 않아서 생각보다 어려웠다. 교통사고로 다리가 부러졌네요, 전치 10주입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상처라면 얼마나 편할까. 마음의 깊이는 제각각이라서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마음을 얼마나 썼는지에 따라 상처는 전부 다르다. 그걸 측정하는 방법이나 치료 기간이나 뭐 하나 확실한 게 없었다. 그래서 열심히 정신과에 가고 상담도 다녔지만 어딘가 속 시원하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도 상담 선생님도 명확하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요즘 들어 정신과나 상담을 갈 때마다 선생님들이 왜 그 대답을 정확하게 해주지 않는지 나름대로 이유를 생각해보곤 했다. 사실 내 마음의 상처 치료는 나밖에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책을 넘기다가 종이에 손가락이 베여서 피가 나더라도, 결국 다시 살이 붙고 새살이 차오르는 건 내 몸이 스스로 하는 일이다. 몸에는 자가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다 있다. 그럼 마음도 똑같지 않을까.
내면에 너무 큰 상처를 입어서 마음이 산산조각 났다. 의사 선생님이나 상담 선생님은 산산조각 난 내 마음을 대신 붙여주는 사람들이 아니라, 부서진 내 마음을 스스로 다시 붙일 수 있게 옆에서 같이 고민해 주고 안내해 주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0000피스짜리 퍼즐을 혼자 맞추려면 막막해서 시작조차 하기 어려울 텐데 옆에서 같이 맞추려고 도와주는 마치 퍼즐 고수 같은 존재.
한 번 부서졌던 마음은 더 쉽게 상처받을 수도 있고, 또 상처받을까 봐 무서워서 마음이 약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내 무릎 위 흉터처럼 결국 새살은 돋아날 거다. 그 상흔을 보고 자랑스럽게 살아남은 흔적이라고 생각하거나 예쁜 그림을 새겨 커버링 타투로 꾸미는 건 모두 내 마음에 달렸다. 그래서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치료하는지는 전적으로 자기에게 달려있다는 생각이 든다.
상처를 감쪽같이 숨기기 위해 급급한 사람은 가끔 상처가 안에서 곪고 썩어서 더 크게 탈이 나기도 한다. 아마도 그게 내 남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는 과거형이 되어버린 사랑이지만 그때의 내 사랑을 부정하고 싶지 않으니 그가 진심으로 치료받기를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그날이 온다면 그때 가서 내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수치심을 느끼기를. 크게 고통스러워하고 처절하게 후회하다가 마침내 성숙해지기를.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속에 깊은 상처 하나쯤은 묻어두고 산다. 나는 가장 사랑하고 믿었던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다. 그리고 글을 쓰면서 정작 상처를 준 사람이 아닌 얼굴도 모르는 독자들에게서 위로를 받고 있다. 다른 이들의 사연은 모르지만 이 글이 누군가의 마음속 상처에 마데카솔처럼 남기를. 바라건대 나는 그러기 위해서 지금 기꺼이 아파하는 중이기를. 시간이 많이 지나서 모든 감정이 소멸되고 초연해질 때쯤에는 내 상처를 스스로 자랑스러워할 수 있기를.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이런 성숙함은 온데간데없고 다시 울부짖는 미친년이 되어도 그 모습을 스스로 받아들여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