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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Nov 08. 2024

[투병기] '전이' - 희망고문의 끝?

그래도 기적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전이’.

어쩌면 이것이 암 환자에게 가장 무서운 말이 아닐까?

말하자면 화재 현장에서 불을 거의 껐는데 다른 곳에 옮겨 붙어 더 큰 불이 나는 격이다.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의 고통을 견딜 수 있는 것은 나을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다. 설사 그것이 ‘무엇이라도 해 봐야 한다’는 절망적인 몸부림일지라도. 의료진을 100% 신뢰하고, 치료 과정에서 모든 지시에 순응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단 한치라도 벗어나면 뭔가 잘못될 수 있으니까.

환자와 환자 가족을 그런 법이다. 자신이 전문의가 아닌 다음 그 병과 치료에 대해 내가 박사인들 무엇을 알겠는가? 여기저기 들쑤셔서 알아본 들 그 지식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것은 단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다. 목숨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니까.

그렇게 생명이 걸린 투병 생활은 답답하고 안타깝고 진이 빠지는 일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의사 선생님의 ‘입만 쳐다보고’ 있으니 말이다. 경과가 좋다든가 그렇지 못하다든가 하는 말 한마디에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나날이다.

우리는 그렇게 철저히 의료진의 지시를 따르면서 ‘생존’에 희망을 걸었다. 

흔히 말하는 생존율이란 것이 5년 생존율을 말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병이 다 나아서 산다는 것이 아니라 치료 후 죽지 않고 5년을 넘긴다는 뜻이다. 건강할 때는 ‘겨우 5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겪어보니 그 5년이란 참으로 소중하고 긴 시간임을 알 수 있었다. 5개월, 아니 5주, 아니 마지막 순간에는 단 5일도 안타까운 시간이므로.


다행히 우리는 항암, 방사선 치료 과정에서 늘 ‘경과가 좋다’는 말을 들었다. 필요한 검사를 하고 담당 교수님을 만나기 위해 진료실에서 대기할 때는 늘 조마조마한 마음이다. 어떤 말을 듣게 될지… 그러다가 긍정적인 말을 듣고 나오면 날아갈 듯하다. 이제 조금만 더 버티면 건강한 몸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차오른다. 그 긍정적인 말 한마디가 항암 치료의 모든 부작용과 고통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준다. 

사실 우리의 경우, 처음부터 별로 희망적이지는 않았다. 

일단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는 곧 수술이 가능한 경우보다 생존율이 절반 이하로 크게 떨어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10%이건 20%이건 무슨 상관인가? 10명 중 한두명이 생존한다… 만약 내가 생존하는 한두명에 속한다면, 내겐 생존확률이 100%인 셈이다. 그렇지 않다면 확률은 0%다. 결국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일 뿐 확률은 무의미하다. 희망과 절망이 뒤엉킨 채 마음을 지배한다. 희망의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절망은 끈덕지게 마음 밑바닥의 끈을 잡아당기고 있다. 

치료 경과가 좋다는 말을 들으면서, 희망을 키워가지만, 한 구석에 드리워진 절망의 그림자는 절대 지워지지 않는다. 환자가 완전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않는 한, 절대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폐에서 암이 거의 사라져간다는 말까지 들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러나 결코 이렇게 순조롭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의료진도, 나도… 어쩌면 환자도… 아니 아는 것이 아니라, 미구에 뭔가 오고야 말 것이라는 예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왔다. 

‘전이’라는 것이다.


“이 놈이…!”


검사 결과를 보고 담당 교수님이 나직이 혼잣말을 내뱉았다. 한탄이었다. 기대가 무너졌다.

설명이 길었는지 짧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중요하지도 않다. 결론은 뇌로 전이되었다는 것, 그리고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치료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게 희망고문은 끝이 난 셈이다. 

수술로, 또는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로 암에서 벗어나는 사람들도 물론 많을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3년 또는 5년 수명을 연장하는 사람도 물론 많다. 하지만 우리는 아닌가 보다.

처음엔 완치를 기대했다. 현실을 어느 정도 깨달으면서 ‘5년 생존이라도’ 정도로 기대치를 낮췄다. 그것이 다시 3년으로 줄어들었지만, 이제 그것 마저도 장담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아니 어려워졌다.

그렇다고 희망의 끈을 놓은 것은 물론 아니다. 우리에겐 신앙이 있으니까. 신앙에는 기적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사실 기적이란, 마른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그런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닌 기적은 실제 경험할 수도 있다. 살다 보면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던 문제가 몇가지 우연이 겹치면서 뜻하지 않게 풀리는 일을 경험하기도 한다. 신(神), 내가 믿는 바로는, 하나님의 역사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말기 암 환자가 기적적으로 건강을 되찾은 기적에 관한 이야기는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운동이든, 생활습관의 변화이든, 특정 약물이든, 음식이든… 뭔가를 하거나, 바꾸거나 해서 살아났다는 기적… 그런 것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더욱이 우리는 열심히 기도하고 있으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료실을 나오는 발걸음은 천근만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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