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간직할 사랑과 슬픔의 변주
“사랑은 도대체 무엇이고, 슬픔은 또 무엇인가.”
이런 의문이 떠오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가늠할 수 없는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그러므로 슬픔의 원인은 상실이고, 그 상실은 사랑, 즉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입니다. 사랑이 없었으면 슬픔도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생각이 떠오른 것은 누군가 내게 한 말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깊은 슬픔에 빠져 있는 나를 위로해 주고 신경을 많이 써주던 사람이 한 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무 미련을 두는 것 아니냐…, 집착하는 것은 아니냐…?”
물론 그 사람은 나를 위로하고 달래 주려는 의도에서 한 말이었지만, 나는 꽤 충격과 상처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미련, 또는 집착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과연 너무 미련을 갖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집착인지…
누구나 애착하는 것은 있고, 그것을 잃어버리면 마음이 상하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옷일 수도 있고, 신발 또는 가방일 수도 있으며, 또 다른 어떤 사물이나 장소일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내가 좋아하는 긴 코트가 있습니다. 아주 오래된 것인데, 지금은 몸에 잘 맞지도 않고, 구식이라 입으면 뭔가 좀 어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처음 사서 입었을 당시 너무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애착을 가졌던 물건이라,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입지도 않으면서, 버리지 않고 옷장에 걸어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애착이 강한, 그래서 집착하는 성향이 있는 사람일까요?
‘미련’이란 무엇일까요?
사전은 ‘깨끗이 잊지 못하고 끌리는 데가 남아 있는 마음’이라고 정의합니다. 깨끗이 잊는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요? 그렇다면 사랑하는 그 사람을 깨끗이 잊어야 한다는 말일까요? 그 흔적마저 지워버려야 한다는 뜻일까요?
사전적인 풀이라면 미련을 갖지 말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그토록 사랑한 사람을 깨끗이 잊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집착’은 또 무엇인가요?
어떤 것에 늘 마음이 쏠려 잊지 못하고 매달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집착 또한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너무 미련을 갖지 말라,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충고는 사전적인 그런 뜻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미 떠난 사람, 아무리 슬퍼하고 그리워해도 다시 만날 수 없고, 행복했던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없으니, 그런 현실을 인정하고 마음을 다잡아라… 뭐 이런 뜻이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나의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아버지께서는 마흔에 내 어머니, 즉 당신의 아내를 잃으셨고, 그로부터 정확하게 5년 후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서른여덟 꽃다운 나이에 당시 표현으로 ‘괴질’에 걸려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나는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해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 당신은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둥이는 사경을 헤매고 있고, 젊은 아내는 세상을 떠나버리고… 그 슬픔이 오죽했겠습니까?
그래서 아마도 술에 많이 의존을 하셨던 모양입니다.
집안에서는 아직 어린 5남매 양육이 큰 일이라, 재혼을 서둘렀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떠밀리다시피 재혼을 하셨고, 그래서 내게는 새엄마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늘 돌아가신 어머니 꿈을 꾸셨다고 합니다.
새어머니는 훗날 저에게 이렇게 푸념하셨습니다.
“네 아버지는 나와 산 게 아니라, 네 (친) 엄마와 사셨다”
아버지는 밤이면 종종 꿈에 어머니가 나타나셔서 좋아하는 음식 다과 음료 등으로 극진히 섬기셨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거의 정확하게 만 5년이 되던 날 아버지는 어머니 곁으로 가셨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두 분이 정말 너무 사랑하셨나 보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이것이 미련과 집착의 결과였을까요?
나는 아내를 잃고,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그제야 당시 아버지의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어쩌면 나도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5년 내로 따라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와 달라도 많이 달랐습니다.
우선 그렇게 아내를 애타게 그리워했지만, 꿈에서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노트를 한 권 남겼습니다. 사후 처리에 대하여 꼼꼼하게 이것저것 지시하는 내용으로 언제 그렇게 기록을 했는지, 간병인을 단 1분도 쓰지 않고, 직접 24시간 간병한 나도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그렇게 온갖 잡다한 내용과 아이들에게 당부의 말을 쓰면서, 나에 대한 것은 단 한 줄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용하던 침대도, 마지막으로 입원하기 전에 새것으로 바꿔놓고 갔습니다.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내게 자유를 주고, 미련을 버리라는 뜻이라고.
과연 그런 것일까요?
그녀가 병상에 있는 동안, 우리는 한 시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 지냈습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집에 잠깐 들르는 시간을 제외하면, 나는 그녀의 병상을 떠나지 않고 지켰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손을 놓지 않고 서로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내게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남길 필요가 없었던 것일까요?
정말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미련을 버리고, 자유롭게 살라는 뜻이었을까요?
굳이 멀쩡한 침대를 바꾸라고 고집한 것은 무슨 뜻이었을까요?
그것 역시 미련을 끊어버리려는 의도였을까요?
그 사람을 따라갈 수 있는 ‘시한’ 5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꽤 편안히 그 사람을 추억합니다. 이런 글을 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이 글을 쓰면서 울컥하지 않은 때가 없고, 울지 않은 때가 없습니다. 그래도 그 울음, 그 울컥함은 고통으로만 쥐어짜는 울음이 아닙니다. 행복했던 추억이 아련하고,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때도 많습니다. 아름답게 그녀를 추억할 수 있는 지금은 미련도, 집착도 병적인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색의 한 부분처럼 느껴집니다.
이런 미련, 이런 집착이라면 언제까지 가지고 있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사랑이란 어떤 사람에게 애착을 갖고, 그래서 그 사람이 떠난 후에는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집착하게 되는 그런 것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