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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Nov 08. 2024

참된 위로는 어디에 있습니까?

가장 깊은 슬픔의 골짜기에서 ‘나의 이야기’를 말없이 들어주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여러분은 어떤 위로를 받았나요? 누구로부터 위로를 받았나요?

가족 친지 친구 지인 동료 등등 모두가 달려와서 위로의 말을 건넵니다. 그들의 위로에는 진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 스스로도 애통해 하면서 어떻게 하든, 단 한 마디라도 위로가 될 만한 말을 해 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사실, 대부분의 경우,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그랬습니다.

더 이상 고통 없는 좋은 곳으로 갔을 거야, 너무 상심하지 마라, 힘 내라 등등의 격려성 위로. 그런 가하면 “어떻게 해, 어떻게 해” 하면서 손을 맞잡고 안타까움을 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종교적 신념에 따라 천국의 소망을 말하는 이도 있고, 다음 생의 행복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겠죠.

그러나 사실, 제 경험 상으로는 그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제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이 달려와서 함께 슬퍼해주는 것 그 자체로는 위로가 됩니다. 아니 ‘위로’라기 보다는 애도에 힘을 보탠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고마운 일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위로의 말이 오히려 부담이 되고 상처가 되는 사례도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자신의 다양한 인생 경험으로 이런 슬픔은 익히 잘 알고 있으며, 그러므로 이러이러하게 극복해야 한다는 등의 조언을 늘어놓는 일입니다.

사실 처음에는 너무 슬퍼하지 말고 힘내서 씩씩하게 살아야 한다는 등의 말은 위로는 커녕 큰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저의 경우, 그나마 가장 위로가 되었던 경우는 그저 손을 맞잡고, 또는 가볍게 포옹을 하고 함께 말없이 울어주거나 어깨를 토닥여주는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일생을 통해 가장 큰 슬픔입니다. 다른 어떤 상실보다 이것이 치명적인 까닭은 말할 것도 없이 돌이킬 수 없다는 점입니다. 어떤 큰 불행을 겪어도, 그 가능성이 아무리 희박할지라도, 회복하거나, 다른 방향에서 ‘보상’ 받을 수 있는 여지는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어떻게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 스스로 생각해봐도 그렇습니다. 누군가의 장례식장에 문상을 갈 경우, 가는 시간 내내 적절한 위로의 말을 생각해내려 해도 결국은 별 소득 없이 그저 상투적인 말 한 마디로 그 자리를 모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냥 손을 잡아주고, 좀 덜 친한 경우라면 문상 후 정중하게 목례하는 것으로 서로에게 부담스러운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지요.

애도와 위로의 마음만 진실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뭔가 유족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결정적인 한마디는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장례 절차가 끝나고 모두가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이제 정말, 사랑하는 아내도 없이 홀로 남겨지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저녁이 되어도 그 사람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잠자리에 들 시간에도, 아침 일어나야 하는 시간에도 혼자입니다. 아무 것도 변한 것은 없지만, 홀로 남겨진 이 상황은 모든 것이 변해버린 상태입니다.

어떠한 수단으로도 이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나는 홀로 남겨졌고, 그 사람은 떠나고 없습니다. 외로운지, 슬픈지, 고통스러운지도 모를, 그냥 멍한 상태가 계속됩니다.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눈 앞에서 무너져 내립니다.

그렇게 좋아하던 책도, 그림도, 음악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귀에 차지 않습니다. 공허한 적막…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누가 그 위로를 줄 수 있습니까?

기도합니다. 그러나 마치 하나님은 내게 등을 돌리고 외면하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원망도 해봅니다. 그런 행동이 위로가 될 리 만무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혼자 있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혼자 있지 않을 수 있습니까? 나는 슬픔에 빠져 집에 틀어박혀 있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은, 심지어 아들 딸까지도, 일상에 복귀했습니다. 출근해야 하고, 가게 문 열어야 하고, 누군가 만나야 합니다. 가끔, 잠깐은 모르지만, 오래 같이 있어줄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특히 내가 마음을 열고 위로 받을 만한 사람은 더욱 한정적입니다.

저녁 초대를 받았습니다.

친지 중 근교 전원지역에서 분위기 있는 식당 겸 카페를 하는 분이 있어서 거기에서 친지들이 모였습니다. 물론 저를 위로하기 위한 자리입니다.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면서 아내의 추억들을 이야기했습니다. 지루하기도 하고, 때로 화가 나기도 하고, 때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기도 했습니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재미있는 일화도 있고, 즐거운 추억도 있기 마련입니다. 자연스럽게 흥이 오르고, 즐거운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것이 화가 나는 것입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손위 동서가 골프 라운딩을 제안하는 것입니다. 아내를 묻고 돌아온 지 1주일 만에 골프 라운딩이라니!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나를 혼자 있지 않게 하고, 같이 시간을 보내며, 그렇게 위로하려는 것이려니 해서 초대에 응했고, 필드에서 한 나절을 보냈습니다. 이런 일들이 그나마 시간을 보내는 데는 결과적으로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슬픔에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았다고 생각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외에도 이런 저런 사람들, 특히 아내 쪽 지인들의 식사 초대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서로가 어색한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초대한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 위로가 되려고 애를 쓰고, 저는 그 위로를 받는 모습을 보이려고 애를 쓰는….

가장 화가 났던 초대도 있었습니다.

색소폰 동호회에서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분들과는 가끔 부부 동반 모임을 갖고, 식사와 함께 연주회 형식으로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탓일까요? 이 분들이 부부 동반 모임을 마련해서 저를 초대했습니다. 무엇을 기대한 것일까요? 저는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도 났습니다. 부부 동반 모임에 나만 혼자 덩그러니 가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거기서 즐겁게 어울려서 놀자는 말인가? 꼭 참석하라는 강권이 있어서 그러마 고 해 놓고 서는 당일 문자로 사정상 못 가게 되었다고 통보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속 좁은 반응을 보인 것일까요?


이런 여러가지 일들을 겪으면서 다른 이를 위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는 ‘위로한다’는 데만 온 신경을 쓴다는 것입니다. 즉 주변에 누군가 불행을 당하면, 우리는 ‘좋은 사람’으로서 그 사람을 위로해 줘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낀다는 것이지요. 여기까지는 좋은 일입니다. 문제는 그런 의무감에서 ‘내’가 그 사람을 ‘위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상대방에게 위로가 되건 말건, 나는 위로했으니 할 일을 다했다는 식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대충 ‘때우는’ 것처럼 건성으로 위로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성이 있는 속마음과 달리 그런 식의 위로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위로’란 것은 받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당연합니다.

앞서 말한 부부 동반 모임을 계획한 사람들은 위로하기 위한 어떤 행사를 여는 것만 생각했지, 위로 받아야 할 사람에게 어떤 위로가 필요한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아닐까요? 비유하자면 배가 아픈 사람에게 기침약을 주는 격입니다.


그러나 사실 위로 받아야 할 사람에게 어떤 위로가 필요한지를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 사람의 슬픔이 어떠한 지를 모르기 때문이죠.

사람마다 슬픔의 강도와 종류는 다릅니다. 똑같이 아내를 잃은 남성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 상태는 천차만별입니다. 그 사람의 성향과 이전에 아내를 사랑했던 정도, 얽힌 여러가지 사연 등 어느 하나 같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일 좋은 위로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의 경우, 어느 날 누군가에게 뭔가를 하소연하고 싶은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 누군가가 와서 내 말을 들어주면 그것이 최고의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울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 우는 것보다 누군가에게 기대어 우는 것이 훨씬 위로가 됩니다. 그 누군가가 나의 울음을 고스란히 받아준다면 말이죠.

그래서 어느 날 너무 견딜 수 없이 슬펐던 날, 아내를 가장 믿고 따르던 친구이자 후배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를 나누면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왜 그랬나 후회가 되기도 하고, 약간은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상당히 힐링이 된 느낌을 받았던 것도 분명합니다.

만약 그렇게 붙들고 펑펑 울 수 있는 상대가 있다면 참으로 좋은 일이고, 그 사람은 참으로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것입니다.


상실의 슬픔을 견디는 또 하나의 큰 위로는 그 사람과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남편을 떠나 보낸 어느 미망인과의 대화에서 그런 것을 더욱 뚜렷하게 느꼈는데요. 그 분은 나와의 대화 중에 남편과의 좋았던 추억을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사실 나와 그 분은 그런 정도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만큼 친밀한 관계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둘 다 사별로 배우자를 잃었다는 점에서 어떤 동류 의식 같은 것이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마음에 위로를 받았던 적이 있었음을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그 분의 목소리와 표정에서 어떤 아련함, 아름다운 추억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 묻어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분은 그렇게 이야기함으로써 상처의 치유를 경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최고의 위로는 나의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누군가 나의 사연을 들어주는 것, 또는 그런 상대방이 없을 때 글로 아름다웠던 추억과 지금의 슬픈 마음을 기록하는 것, 그것이 최고의 위로가 된다면, 누군가를 위로해야 할 때, 그 사람의 사연을 들어주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 되지 않겠습니까?

반대로 최악의 위로는 조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너는 이런 상태이니까 이렇게 해야 돼…라는 처방식의 조언은 위로가 아니라 오히려 상처를 주는 행위가 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위로해야 할 때는 나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현 상황을 평가하고, 그에 걸맞은 조언을 찾으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깊은 공감을 가지고 위로가 필요한 그 사람의 이야기를 말없이 들어주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입니다.

가장 깊은 슬픔의 골짜기에서 ‘나의 이야기’를 말없이 들어주는 사람. 그 사람이 진정한 위로자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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