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밤 틀어줘"... 생의 마지막 나날을 최대한 편안하게
"별밤 틀어줘."
깊어가는 밤, 병상에서 잠을 청하기 전에 아내가 종종 청했던 말입니다.
'별밤'.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가요나, 같은 명칭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떠올린다면 틀린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빈센트 반 고흐의 대표작 중 하나인 '별이 빛나는 밤'을 말하는 것이고, 그것을 노래한 미국의 싱어 송 라이터 돈 맥클린의 '빈센트(Vincent)'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그림을 좋아했고, 그래서 이 곡 또한 좋아한 것이지요.
"Starry starry night...로 시작하는 이 노래를 들으면서 잠든 날이 많았습니다.
그는 또 You raise me up'도 많이 좋아했습니다. 워낙 유명한 곡이기도 하지만, 특별한 추억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그런지 모르지만, 한때 국내 호텔 로비나 바에서 필리핀 가수들이 노래하는 것이 유행했습니다. 그때 좀 주제넘지만, 서울 시내 유명 호텔에서 요즘 말로 '호캉스'를 즐긴 적이 있었습니다. 깜짝 이벤트였지요. 그녀는 또 와인이나 맥주를 한잔씩 하면서 분위기를 즐기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웰컴 드링크'라고 하던가요? 그 무료 음료권도 있어서 바에서 와인도 한잔 했습니다. 그때 바로 필리핀 가수가 부른 노래가 'You raise me up'이었습니다.
워낙 유명하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곡이라 특별할 것도 없는 연주라 할 수 있었지만, 왠지 그날은 특별했습니다. 아마 멀리 가지는 않았지만, 집을 떠났고, 좋은 분위기에 와인도 한잔 마신 탓에 꽤나 로맨틱한 감성에 푹 빠졌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그 필리핀 여성의 목소리와 창법도 호소력이 짙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가사 또한 기독교인인 우리에게는 너무나 좋은 내용 아닙니까...?
우리가 있었던 호스피스병동에는 다양한 자원봉사자들이 방문했습니다. 목욕, 이발, 음악, 미술치료, 여러 종교의 성직자들... 그중에는 매주 1~2회 디지털 피아노를 가지고 와서 노래를 들려주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분은 병실마다 돌아다니면서 희망하는 환자 한분 한분에게 조용히 원하는 곡을 불러 주셨습니다. 그분에게 바로 이 'You raise me up'을 청해 들었음은 물론입니다. 우리 둘 다 큰 위로를 받았고, 그래서 지금도 가끔 그분을 떠올리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아내는 라흐마니노프, 쇼팽 등의 피아노 곡들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클래식 음악보다는 조금은 대중적인 곡들이 이런 경우에는 감성을 더 많이 자극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곡들은 막바지 투병 중에는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었고,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처음에는 뼈저리게 슬픈 음악으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슬프지만 그리움을 달래주기도 하는 음악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며 편안하게 울 수 있는 공간이 생각보다는 많지 않습니다. 내 집에서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도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가족 구성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거든요. 예컨대 노부모님을 모시고 있거나 자녀가 함께 살고 있다면 내가 우는 것이 그들을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가장 마음 편한 장소는 자동차입니다. 혼자 운전할 때 차 안은 그야말로 완벽한 나만의 공간이 되니까요. 가끔 운전 중에 생각이 나면 ‘빈센트’나 ‘You raise me up’을 듣습니다. 그 외에 내가 그 사람을 생각할 때 종종 듣는 곡 중 하나는 존 덴버의 ‘My sweet lady’입니다. 이런 곡을 들으면 눈물이 납니다. 그 사람이 생각날 때 듣기도 하고, 또 때로 그냥 울고 싶은 경우도 있어서 그럴 때 들으면 역으로 그 사람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눈물이 너무 많이 흘러 운전을 하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길 한편에 차를 세우고 실컷 웁니다. 퇴근길이라면, 그렇게 한 다음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집으로 들어갑니다.
차의 실내는 그렇게 해서 떠난 사람을 애도하는 가장 소중한 공간으로 큰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또 한 가지, 호스피스 병동에 있을 때 큰 위로를 준 것은 그림이었습니다.
아마도 미술치료 같은 것을 공부하신 분인 것 같은데, 매주 한 번씩 오시는 자원봉사자 분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그분이 우리 병상에 와서 그림을 권했을 때도 탐탁지 않게 생각해 시큰둥하게 응했습니다.
기본 적인 밑그림 있어서 색칠을 하고, 거기에 그분의 설명에 따라 내가 생각하는 것을 그려 넣은 다음 간단한 글귀를 생각나는 대로 적어 넣는 식이었습니다. 물론 그 주제는 우리들의 사랑과 추억입니다.
그렇게 그분의 지도에 따라 그리고 글귀를 생각하고 쓰는 도중 어느 순간에 가슴이 콱 막히는 듯하면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렇게 오열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말없이 제 어깨를 지그시 누르고 울음이 그칠 때까지 기다려주셨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도 모르게 그만…”
“아닙니다. 참… 많이 힘드시죠…?”
그렇게 한번 펑펑 울고 나니까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유치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크게 마음을 치유하는 효과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음악과는 달리 그때 한 번밖에 하지 않았던 ‘일회성 이벤트’였지만, 크게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음악 치료, 미술 치료 같은 것들 우선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 연구되고 실제 적용하면서 가다듬어져서 나름대로의 기능과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상담에서도 그런 것을 느꼈던 것처럼…
어느 책에서 본 것으로 기억하는 것이지만, 임종 전에 느끼는 슬픔을 비롯한 여러 가지 감정도 이미 애도 과정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사소한 것처럼 보여도 상담이나 음악, 미술 치료 등은 기회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입니다. 분명히 어떤 치유 효과를 누릴 수 있으니까요.
덧붙여서 애도나 치유와는 동떨어진 이야기지만, 감사한 것 중 하나로 목욕과 마사지 봉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욕창을 걱정해야 될 정도로 움직이기 어려운 환자에게 청결이란 것은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환자가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을 때는, 예컨대 혼자 앉거나 서 있을 수만 있어도, 제가 어떻게 하든 목욕을 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황이 되니, 목욕 한번 시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목욕 봉사자 분들은 워낙 익숙하고, 여러 분이 함께 좋은 팀워크로 참으로 깔끔하게 모든 것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냥 욕실 밖 벤치에 앉아 편히 쉬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해서 씻고 나온 환자는 상쾌해서 잠도 잘 자게 됩니다.
여기에 더해 마사지하시는 분들이 있어서 팔다리를 주무르고 시원하게 마사지를 해 주십니다. 말하지 않아도 곁에서 보기만 해도 환자가 많이 편안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자원봉사자 분들의 수고로 호스피스 병동에 있는 동안 환자는 최대한 편안한 상태로 지낼 수 있었습니다. 너무 고마워서, 저도 후에 이런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싶은 열망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이나 병원은 병을 치료하는 곳이 아닙니다. 환자가 최대한 편안한 상태에서 생을 마칠 수 있도록 의료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의료진도 통증을 줄여주는데 최우선 순위를 두고, 생의 마지막 나날을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래서 호스피스 병원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한 것은 참 잘한 일이라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이런 사실이 슬픈 가운데에서도 그나마 한 가닥 위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