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 버린 이와의 동행
사랑하는 사람은 갔지만, 그와의 연대, 비록 그것이 가느다란 실 한 올과 같은 것일지라도, 그 끈을 놓고 싶지는 않습니다. 보이지는 않아도 내 곁에 머물게 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사별’이 힘든 까닭은 원하지 않지만 피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이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일단 목숨이 끊어지면, 모든 존엄을 사라지고 곧바로 부패가 시작되는 하나의 유기체에 불과한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그 유해를 서둘러 자연으로 돌려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무리 미련이 남아도 지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모든 엄숙하고 장중한 장례 의식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화려한 꽃상여와 장대한 운구 행렬, 유교식 제사나 기독교 불교 등의 종교의식, 여러 가지 형식의 추도식 등은 모두 이런 이별의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달래는 수단으로 마련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든 고인과 연결된 끈을 잡고 놓지 않으려는 미련… 그것이 과거 우리 관습에서 3년상이나 시묘살이 등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요즈음의 장례 풍습은 허무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3년상의 전통적인 관습이 1년상, 백일상으로 간소화되더니, 지금은 그런 용어조차 사라져 버린 것 같습니다.
과거 ‘굴건제복’이라 하여 거친 삼베로 만든 상복에 두건을 쓸 때는 형편이 허락하는 한 옷을 지어 입었습니다. 그것이 검은 양복과 치마저고리로 바뀌고, 그것도 장례업체난 상조회사에서 대여하는 것으로 바뀌었죠. 대여이므로 당연히 장례 후에는 반납해야 하겠죠? 우리의 경우, 수목장 절차를 마치자마자 당일 모두 수거해 가더군요. 3년상, 1년상 등이 끝나는 것을 ‘탈상’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즉 상복을 벗는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니까 오늘날 탈상은 장례 절차가 끝나면 바로 이뤄지는 것이어서, ~년상(年喪), 또는 ~일상(日喪)이란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지요.
형식이 내용을 결정한다고들 합니다. 그런 면에서 상복을 벗는다는 것은 서둘러 사별의 아픔을 벗어버리는 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심하게 말해서 속히 ‘털어내 버리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셈입니다.
물론 상복을 입느냐 입지 않느냐가 본질은 아닙니다. 그러나 옷차림이 마음가짐을 상당 부분 좌우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딱히 어떤 전통이나 관습, 또는 형식이 아니라 추모와 애도의 표현으로서 스스로 정한 어떤 형식을 지키는 것도 소중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거기에는 복장도 포함됩니다. 나름대로의 상복을 입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단지 겉으로 보이는 옷만이 아닌 마음의 상복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찌 보면,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슬픔 속에 가두어 버린 셈이 되었습니다. 마치 슬픔을 무슨 훈장인양 부여잡고, 그것이 새어 나가지 못하게 꽁꽁 틀어막고 있는 것 같은 상태가 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렇게 애써 가두어 두려고 했던 것은 슬픔이 아니라 이제는 영영 떠나가 버린, 그래서 이 땅에서 실체로 곁에 둘 수 없는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직 떠나보낼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좀 더 ‘영혼의 동행’이라고 할까요… 그런 식으로 뭔가를 부여잡고, 그래서 위로를 받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유품 정리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보통은 주변에서 서둘러 유품을 정리해 버립니다. 물론 나쁜 뜻이 아니라 망자의 흔적을 최대한 지워서 슬픔을 덜어주고, 일상으로의 복귀를 도와주려는 것으로 이해는 됩니다. 그러나 홀로 남아 슬픔에 잠겨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런 일이 야속하게 느껴지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어느 날 두 자매, 그러니까 처형과 처제가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근처 식당에서 같이 식사를 하고 집에 들어오자, 두 사람은 당연한 일을 하는 듯, 옷장 문을 열고 옷부터 정리하기 시작합니다. 순간 의아했지만, 곧 무슨 일인지 알아차렸습니다.
“아니… 왜…”
“정리해야죠…”
“그래도… 아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서운해도 빨리 정리하는 것이 좋아요.”
그렇게 약간의 대립이 있었습니다. 저는 고집을 부렸고, 결국 일단은 그대로 두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그렇게 해서 옷가지는 물론 쓰던 펜이나 노트, 책, 화장품, 미용도구, 구두와 핸드백 등등 모든 것이 그대로 보전되었습니다. 사실 그것들은 아내가 처음 검사를 위해 입원하던 당시부터, 일상적인 변화 외에는, 그대로 있었으므로, 사실상 아프기 전 일상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상태라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당장이라도 돌아오면 아무 불편 없이 그대로 일상을 이어 나갈 수 있는 상태였던 것이지요. 그리고 언제나 나는 그 사람이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았습니다. 떠나 버렸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었지요.
그런 상태였다고 해서 특별히 더 슬펐거나, 힘들었던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초기 견딜 수 없는 슬픔에 빠져 몸부림칠 때나, 정신과 치료를 받던 시기나 유품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해서 그것이 특별히 상태를 더 악화시킨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여전히 함께 하는 것 같아서 위로가 되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집 문제입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까 주변에서 이사를 권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집과 활동 지역이 꽤 멀어서 불편하기도 했거든요.
“왜 거기 혼자 그러고 있어? 멀어서 불편하기도 한데, 그건 아주 좋지 않아. 근처로 이사하는 게 어때? 이쪽으로 오면 근처에 친지들도 있어 외롭지 않을 텐데…”
실제로 주변에서 그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내가 없는 집에서 혼자 잠자는 것이 무섭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집에 들어가는 것이 싫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애착인지, 집착인지 오히려 그 집을 떠나기는 싫었습니다. 우리가 은퇴 후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기 위해 일부러 호수공원 가에 장만한 집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정작 그 집에서 은퇴 후의 여유를 단 하루도 즐기지 못했습니다.
실제 서울까지 매번 오가는 것이 시간도 많이 걸리고, 불편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내를 떠나보냈던 바로 그 호스피스 병원을 매번 지나야 했던 것도 많이 괴롭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2년 여를 지내다가, 여러 가지 사정이 겹쳐서 마침내 이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렇게 이사를 하면서 아내와 함께 했던 공간도 잃게 되었습니다. 일부 유품만 챙기고 대부분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었으니까요.
시간은 그 누구의, 그 무엇의 눈치도 보지 않고 저만의 법칙으로 고집스럽게 흘러갑니다. 그렇게 부여잡고 있었건만, 불과 2년여 만에 하나하나 사라지고, 그 흔적만 가슴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 흔적은 실체보다 더 또렷한 또 하나의 존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