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골과 높은 산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에 닿으리라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
그러므로 슬픔이 깊은 것은 사랑이 깊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절망적일지라도 숨이 붙어있는 것과 숨을 거두어 버린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차이입니다. 아무리 폭이 좁고 얕을지라도 요단 강의 이편과 저편은 그렇게 다릅니다. 아니 다르다는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전혀 차원이 다른 세계입니다.
이제 끝이 보이지 않는 슬픔과 고통의 심연이 앞에 가로놓여 있습니다. 아니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마치 입구부터 캄캄한 절망적인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속으로 한 발만 내디디면 끝없는 심연으로 내동댕이쳐질 것 같은…
슬픔의 골짜기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걸어가면서 가끔은 하늘을 쳐다봅니다. 울창한 삼림에 가려져 낮에도 어두컴컴한 절망뿐입니다. 앞을 바라봅니다. 언제 어디서 이 길이 끝날지 알 수 있기는커녕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습니다. 한없이 펼쳐진 깊은 골만 보이지 높은 산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 얼마 전 그 산에서 내려왔는데 말입니다.
사별로 배우자를 잃는 것은 일생을 통해 가장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라 할 만한 일입니다. 그것은 부모 형제 자녀 친구 등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을 떠나는 것과는 크게 다른 경험입니다. 보통은 일생 동안 단 한번 겪는 일입니다.(두 번째 겪는 경우가 드물지 않겠지만, 그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일일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삶이 완전히 뒤엎어지는 것이며, 나 자신이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변하는 계기가 되고, 따라서 나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이 세상과의 관계 등 모든 관계가 변하는 전환점이기도 합니다.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물론 무덤덤하거나 그다지 충격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그 슬픔의 강도와 양태가 다를 뿐이지 크나큰 변화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우선 견딜 수 없는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립니다. ‘왜?’라는 의문과 함께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것은 자연히 자신이 믿어왔던 신이나 다른 모든 것에 대한 원망을 동반합니다. 절망이 멘털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거기에 후회가 밀려옵니다. ‘왜 이 사람을 지키지 못했는가’하는 뼈저린 후회입니다. 게다가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미련과 집착이 더해지면서 온갖 생각으로 스스로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게 됩니다.
한마디로 그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하고 어지러운 감정의 소용돌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슬픔과 고통의 쓰나미가 덮치는 것입니다. 그냥 넋을 놓고 휩쓸려 가버리면 좋을 것 같은 그런 혼돈입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는 삶이 있습니다. 돌봐야 할 가족이 있을 수도 있고, 내가 속한 직장, 공동체, 사회에 대한 책임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또한 쓰나미에 휩쓸린 가운데서도 똑바로 서서 걸어가도록 강요합니다.
그렇게 엄청난 재난 속에서 어떤 사람은 쓰러져 버리고, 어떤 사람은 넋을 놓아 버리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허우적허우적 비틀거리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어떤 사람은 최소한 겉으로는 씩씩하게 뚜벅뚜벅 걸음을 내딛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정상이라고 합니다. 슬픔과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죽는 것도, 씩씩하게 이겨 나가는 것도 옳고 그름이나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그냥 그렇게 있는 경우의 수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쓰러지는 사람보다 씩씩하게 이겨 나가는 사람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더 가치 있거나 더 나은 사람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런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슬픔이 깊고 오래가는 것은 그만큼 떠나버린 사람을 많이, 깊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비교적 빠른 시기에 씩씩하게 이기고 일어선 것이 반드시 망자를 덜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것은 개인 차이이고, 죽음에 맞서는 태도의 차이일 따름입니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는 것은 진리에 가깝습니다. 그런 만큼 많이 사랑했다면 슬픔도 깊기 마련입니다.
저는 프리랜서라는 직업의 특성상, 슬픔과 고통에 푹 빠져 있을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그 슬픔과 고통에 가둘 수 있었고, 깊이 침잠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달리 심한 앓이를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루 24시간을 거의 온전히 슬픔에 빠져 있었던 시기도 6개월 이상 지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일주일 내내 집 밖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고, 그렇게 칩거하면서 스스로를 슬픔과 고통에 가두어 두었던 것이지요. 그것이 고열과 진통으로 몸을 괴롭힌 적도 있었고, 무기력에 빠뜨려 일상생활을 어렵게 만든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버티다가 결국 10개월 여 지난 후 상담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정신과 치료를 받았고, 처방받은 약을 복용하면서 생활이 다소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가 지나고, 또 해가 지나면서 어느덧 그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럭저럭 일상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여정은 깊은 골짜기를 지나온 것과 같습니다. 그 골짜기를 길도 모르고 더듬어 지나온 끝에, 아니 제 발로 걸어 나왔다고 하기보다는 어떤 힘, 거스를 수 없는 세월에 떠밀려 온 끝에 마침내 하늘이 보이는 곳까지 나왔습니다. 그리고 돌아보니 지나온 골짜기도 보이고, 그 골짜기 좌우에 우뚝 선 산도 보입니다. 마침내 깊은 골과 높은 산을 함께 볼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그 골과 산의 조화가 빚어내는 아름다움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슬픔과 고통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면 누구나 맞게 되는 아름다운 결과 아닐까요? 그 고통 속에 쓰러져 버리지만 않는다면 말이죠.
모든 산과 골짜기는 어우러져 아름답습니다.
우리의 사랑, 그리고 헤어짐의 고통과 슬픔도 돌아보면 그렇게 어우러져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