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과 고통의 터널을 지나며
“우리 아무래도 잠깐 헤어져야겠어…”
사랑하는, 한없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임종을 앞둔 그 사람에게 어떻게 작별인사를 해야 할까요?
아니 그전에 이제 삶이 끝나고, 우리는 헤어져야 한다는 그 사실을 어떻게 말해 주어야 할까요?
아니 그것을 말해 주어야 할까요, 하지 말아야 할까요?
저는 끝내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차마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내가 마지막 희망까지 버리는 것 같았고, 그것은 결국 그 사람을 ‘버리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망설이고, 망설이고, 또 망설이고… 그렇게 수없이 망설이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떠나보내고 만 것입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했습니다. 병세의 악화, 치료 과정의 변화, 그리고 대학병원에서 호스피스병원으로의 전원 등 모든 정황이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당사자가 이를 모를 리 없습니다. 아니 모를까요? 아니면 마지막까지 희망을 붙들고 있을까요? 그렇다면 내가 뻔히 알면서 불가능한 희망을 이야기해야 할까요?
“당신이 이 병원에서 꼭 걸어 나가도록 할 거야!”
호스피스병원에 들어가면서 약속했습니다. 그때는 물론 희망이 사실상 꺼졌지만, 나름대로 의지와 믿음이 있었습니다. 한 가닥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니 그 말이 전혀 마음에도 없는 것을 꾸며낸 소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루하루 지나면서 헛된 희망은 줄어들고 그 자리에 냉혹한 현실이 자리 잡고, 그 영역을 점차 넓혀갑니다. 거역하거나, 저항할 수 없는 어떤 숙명 같은 것이 조용히, 그러나 무섭게 밀려들어오고 있습니다. 속수무책 그 물결에 모든 것이 휩쓸려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마지막 작별인사말을 생각합니다. 머릿속에 수없이 썼다가 지우고, 다시 쓴 끝에 문장을 하나 만듭니다.
“우리 아무래도 잠깐 헤어져야겠어…”
그리고 이것 만으로는 너무 부족한 것 같아서 덧붙였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하늘나라에서 곧 다시 만나자.”
수없이 되뇌고 연습했습니다. 하지만 언제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또 막상 말하려 하니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망설이다가 끝내 말하지 못하고 떠나보내고 말았습니다.
긴 터널을 지나왔습니다.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고, 또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고… 슬픔과 고통, 그리고 외로움, 그 속에서도 지독하게 이어지는 일상. 이 모든 것이 어느덧 하나의 유기체처럼 되어 삶의 일부로 녹아들었습니다. 모든 것을 무력화시키는 슬픔, 그 절대적인 슬픔에 푹 빠져 있던 첫 몇 달이 지나고, 그것은 고통이 되어 절망으로 치달았습니다. 그렇게 또 5~6개월을 보내면서 거기서 스스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결국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데에 정신과 치료 – 약의 힘을 빌었습니다. 그리고 2년여 만에 약을 끊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경로로 이 고통의 터널을 지날 것입니다. 강도가 다르고, 겪는 양상이 모두 다르겠지만, 그 슬픔과 고통이 크고 깊은 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창조적 슬픔’이란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슬픔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슬픔도 삶의 한 부분이고, 그것이 인생의 창조적 힘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슬픔과 고통의 터널을 지나면서 든 생각입니다.
우리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대비하는데 익숙합니다. 성공은 좋은 것이고, 실패는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지요. 슬픔과 기쁨, 승리와 패배, 합격과 불합격, 행복과 불행, 부유와 빈곤 등등 그런 대립쌍은 많습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란 금언이 생각납니다. 하지만 왜 실패가 꼭 성공의 어머니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실패는 그것을 딛고 성공할 때만이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실패는 실패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실패와 성공이란 개념 자체도 사회 통념에 불과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슬픔도 슬픔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슬픔도 내 삶의 한 부분, 그것도 아름다운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사별의 경우, 서로 사랑했고, 행복했으므로 슬픔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은 그 사람, 그 사랑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행복, 그리고 상실과 슬픔은 대립쌍이 아니라 뗄 수 없는 한 몸인 것이지요.
하늘나라로 떠난 그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 어떤 실체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시는 볼 수 없고, 손도 잡을 수 없고, 그 목소리도 들을 수 없습니다. 육신이 없는 존재. 그래서 오히려 더 늘 가까이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영적인 존재가 되었고, 나는 육신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둘 다 육신의 존재였을 때는 알콩달콩 행복하기도 했지만, 이런저런 일로 부딪치고, 티격태격 싸우고, 서로의 감정을 할퀴기도 하면서 위기를 겪기도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런 불편한 기억은 말끔히 지워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남은 것은 행복한 추억뿐, 모든 기억이 애틋합니다.
그는 언제나 함께 있으며, 언제든 생각나면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감정의 충돌도 없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은 점점 더 좋은 모습만 걸러져 남게 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완벽한 인간으로 그려집니다. 어쩌면 조상 숭배가 이런 관점에서 시작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됩니다.
저는 12살 때 잃은 아버지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평생 지니고 있었습니다. 저를 너무나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그리움이 쌓이다 보니 아버지는 제 기억 속에 완벽한 존재로 남았습니다. 좋은 모습만 기억하다 보니까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미화되고, 그래서 어쩌면 신격화되는 수준에 이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분은 내 기억 속에 가장 멋진 남자, 완벽한 사람으로 남아 있습니다.
바로 비슷한 과정이 아내에 대한 추억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는 듯합니다. 좋은 모습, 좋은 기억만 남아 완벽한 아내, 완벽한 여성으로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은 이제 더 이상 어떤 다툼도 갈등도 없는 편안한 상태입니다.
그런 추억과 슬픔이 이제 하나로 묶여 한 권의 책이 되어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책꽂이에 꽂혀 있는 듯합니다. 한참을 그냥 책장에 꽂아 두기만 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다시 꺼내 펼쳐 보기도 합니다. 때로는 읽다가 테이블 위에 펼친 채 놓아두기도 합니다. 어느 장면에서는 행복했던 기억을 읽으면서 미소 짓기도 하고, 또 다른 페이지에서는 슬픔이 되살아나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이 모두가 슬픔과 고통의 긴 터널을 지나면서 모든 것을 견뎌낸 결과일 것입니다. 이 터널을 완전히 벗어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니, 이 터널이 끝이 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견뎌내면 새로운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견뎌낸다는 표현이 옳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나의 의지로 견뎌내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흐르면서 ‘견뎌진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 것 같습니다.
슬픔과 고통의 터널을 지나온, 그리고 지나고 있는 저의 경험의 핵심을 요약하면 대략 이렇습니다.
내가 겪는 모든 현상, 감정 변화, 일상생활의 어려움, 슬픔의 강도와 형태 등은 정상적인 애도 과정이다.
고인을 충분히 애도하고 상실을 슬퍼하라.
슬픔과 고통을 조급하게 극복하려고 하지 않고 어느 정도 시간에 맡기는 여유가 필요하다. 신속하게 극복하는 지름길은 없다.
슬픔과 추억 등 내면의 응어리를 토로하라. 성실히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와 이야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글로 표현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도저히 견디기 힘든 경우에 약물에 의존하는 것을 주저하지 말라. 단 약은 반드시 전문의의 처방을 받도록 한다. 특히 불면 악몽 등에 시달린다면 정신과 치료를 받는 것이 좋다. (정상적인 수면이 정신과 신체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된다)
새로운 인연의 가능성도 억지로 거부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