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의 여인

억압 속에서 빛나는 찬란한 태양

by 제이슨

페르시아와 이란, 위대한 착각


이것은 억압, 무엇보다도 여성에 대한 억압에 관한 이야기다.


"위대한 국가 이란이 시온주의자의 가짜 정권(이스라엘)에 승리를 거둔 것을 축하한다."

2025년 6월 26일 이란의 최고지도자인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란 사람이 영상연설을 통해 한 말이다. 앞서 6월 21일 땅을 60미터나 뚫고 들어간다는 GBU-57이란 어마어마한 폭탄 여러 발이 이란의 포르도 지하 핵시설 위에 떨어졌다. 이스라엘의 집중 공습 이후에 마치 마침표를 찍듯이 이뤄진 미국의 폭격이었다. 그리고 결국 휴전을 하면서 최고지도자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는 또 이스라엘이 이란의 공격에 “거의 붕괴됐고”, 미국도 “직접 전쟁에 돌입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고 이란은 미국에 엄청난 모욕을 안겼다"라고 주장했다.

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말이다. 12일간의 전쟁 결과 이란과 이스라엘이 입은 피해 정도는 최소 10대 1 정도였다. 이란 군 최고 지도부와 핵과학자 20여 명이 몰살당했다. 방공망, 미사일 발사기와 제조설비, 핵 관련 시설 등은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하메네이 자신은 이스라엘의 공격이 무서워 지하 벙커에 숨어있었다. 말이 휴전이지 사실상의 굴복이었다. 그런데 ‘승리’라니?


이건 그냥 남의 나라 이야기, 우리와는 관계없는 먼 나라의 뉴스 중 하나가 아니다. 도그마와 억압의 무서운 내러티브다. 그리고 수많은 ‘누군가’는 그 피해를 고스란히 온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비극이다.

실제 휴전 소식을 접한 이란 사람들의 반응은 “미래가 두렵다”는 것이었다. 이번 대결을 구실로 정권의 억압적 통치가 강화될 것을 걱정한다는 것이다. 휴전은 '더 나쁜 일이 생기기 전의 잠깐의 휴식’ 일뿐이며 뒤이어 닥칠 ‘후폭풍’이 무섭다는 이야기다.


이란은 페르시아의 후예다. 페르시아제국은 BC 550년 키루스 2세가 메디아왕국을 정복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준 고레스가 바로 이 사람이다. 보니 엠의 노래 ‘바빌론 강가에서’(Rivers of Babylon)‘는 경쾌한 댄스 음악인 것 같지만, 사실은 유대민족의 바빌론 포로생활의 고난을 한탄하는 성경 시편 137편을 가사로 하는 슬픈 노래다. 그런 슬픔에서 해방시켜 주었으니, 이란과 이스라엘의 인연은 역사가 깊을 뿐만 아니라 호의적이었던 셈이다.

아무튼 페르시아제국은 다리우스 1세 시대에 그리스에서 인도에 이르는 제국 최대 판도를 확보하면서 당대 세계 최강대국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이후 BC 330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수도 페르세폴리스가 함락되면서 멸망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아케메네스 왕조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페르시아의 역사는 AD224년 아르다시르 1세가 파르티아 제국을 멸망시키면서 부활한다. 이것이 사산 왕조의 후기 페르시아 제국이다. 후기 페르시아 제국은 한때 비잔틴과 쌍벽을 이루는 세계 최강국이었지만, 651년 이슬람 아랍군에 의해 멸망한다. 여기서 오늘날 이슬람 국가로서의 페르시아-이란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쓸데없이’ 역사를 장황하게 이야기한 것은, 이것이 오늘날 이란을, 특히 앞서 인용한 최고지도자 하메네이의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소리’를 이해하는 바탕이며, 뒤에 소개할 책 내용을 이해하기 위한 지침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누가 들어도 뚱딴지같은 소리인 하메네이의 ‘승리 선언’은 ‘위대한 제국’의 역사와 이슬람 원리주의의 도그마가 버무려진 ‘정신 승리’의 메시지라는 것이다.


이란은 현재 신정(神政) 국가이고, 대통령 위에 있는 종신 최고지도자 하메네이는, 이맘’ 후세인[i]의 ‘화신’으로 ‘신의 대리인’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그가 스스로 거짓임을 알면서도 정치적인 고려에서 내놓은 ‘수사(修辭)’이건, 실제 그의 신앙에 바탕을 둔 확신에 찬 고백이건, 이란 국민들에게 가해질 억압의 억압의 무게는 상상 이상일 것이다.


그 무게는 이 페르시아 여인을 만나면 생생한 현실로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나의 몫


『나의 몫』/파리누시 사니이/열린책들/2020(4판)

파리누시 사니이 『나의 몫』 표지

한 페르시아 여성, 즉 이란 여성의 일대기다.


그러나 그냥 일대기가 아니다. 현대 한국인 입장에서는 3가지 이질적인 체제 속의 삶을 접한다. 첫째는 이슬람이고, 둘째는 왕정이며, 셋째는 신정(神政)이다. 우리에겐 모두가 생소한 것이다. 거기에다 특히 여성의 삶이다. 사랑과 결혼, 자녀와 신앙, 그리고 무엇보다도 혁명과 체제 변혁, 전쟁 등 현대 이란의 격동기 사회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전부는 아니지만, 이란이라는 나라와 그곳 사람들의 삶에 대하여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지은이 파리누시 사니이는 이란의 최상위 엘리트에 속하는 여성이다. 심리학자이며 사회학자로서 정부에서 교육과 관련한 많은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팀을 이끌기도 하고, 여러 대학에서 강의도 했다. 이란의 현실에 대한 정확한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나의 몫』은 이란 정부가 2번이나 판매금지 조치를 내렸다. ‘금서’였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책 내용은 체제를 비판하거나 반정부적인 사상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한 여성의 삶을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을 뿐… 그런데 그것이 체제의 치부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즉 이슬람 신정체제에 심각하게 잘못된 부분이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이것은 현대적 자유 민주주의에 입각한 판단이다. 다른 말로 오늘날 보편적 가치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고, 그것이 그냥 ‘다름’이 아니라 보통 사람에게 심한 고통을 주는 요소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주인공인 10대 여학생 마수메는 오가는 길에 있는 약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 보조 약사에게 호감을 느낀다. 상대방도 마수메의 호의를 느끼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그리나 딱 거기까지다. 마수메의 인생이 사실상 여기서 끝나버리는 것이다. 이후 그녀 삶의 모든 것은 자의가 아닌 타의가 지배한다.

이 사실을 안 마수메의 집안은 발칵 뒤집힌다. 사랑에 빠졌다고 해서 데이트를 하거나, 사랑을 나눈 것도 아니다. 조심스럽게 편지를 주고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마치 무슨 큰 불륜이나 저질러 발각된 것처럼 난리가 난다.


이유는 간단하다. 여자가 정숙하지 못하게 바람이 났다는 것, 그것이 집안의 “명예를 더럽힌다”는 것이다. 실상을 적나라하게 말하면, 아버지와 오빠들 등 남자들의 ‘명예’를 더럽힌다는 것이다.

마수메는 그렇게 핍박을 받고, 폭행도 당한다. 상대 대학생도 살해 위협을 받는다. 웃기는 것은 오빠들 중 마수메를 가장 괴롭히는 자는 술과 마약에 손을 대고 유부녀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점이다. 당연히 ‘명예’ 운운하면 “무슨 명예?”라는 반문이 절로 나온다. 결국 마수메는 서둘러 강제결혼을 하게 된다.

그나마 마수메의 집안은 온건하고 사려 깊은 편이다. 좀 더 과격했다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지만, 강제로 시집 ‘보내는’ 선에서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상대 대학생도 고향으로 도망쳤다. 그렇게 마수메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타의에 의해 강요된 삶을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수메는 다행스럽게도 괜찮은 집안의 괜찮은 남편을 만났다.

당시는 팔레비 왕조가 다스리던 왕정시대. 마수메의 남편 하메드는 그 전제정치에 저항하는 ‘좌파 운동가’였다. ‘괜찮다’고 하는 것은 그도 집안의 성화에 떠밀려 결혼을 했고, 그래서 결혼 생활에는 큰 관심이 없었으며, 오히려 여성 인권에 대해서는 전향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결혼의 겉모습만 착실히 유지하는 것 외에는 간섭하지 않고 마수메에게 자유를 준다. 덕분에 마수메는 대학 공부도 하게 된다. 그래도 부부 관계는 관계인지라 마수메는 자녀도 낳고, 결국은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삶을 산다. 그리고 장성한 자녀들을 결혼시키고 인생의 황혼기로 접어든다.


강요된 삶이었지만 결혼 후의 삶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랑 없는 결혼이었지만, 부부 관계도, 이슬람 사회의 고질 중 하나인, 남편의 억압이 없었으니, 그나마 괜찮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마수메를 편안하게 놔두지 않았고, 그 ‘빌어먹을 남자들의 명예’는 끝까지 그녀의 발목을 잡는다.

우선 큰 불행은 남편의 죽음이다. 이란의 실상을 잘 모르고 보면, 그냥 하나의 불행한 사건으로 보이지만, 기실 여기에는 복잡한 역사가 숨어있다. 이란의 왕정을 무너뜨린 1979년 이슬람 혁명의 진실이 그 이면에 있는 것이다.


이슬람 혁명 전의 이란은 팔레비 왕조가 다스리는 왕정 국가였다. 이란의 근대 역사는 복잡하다. 제국주의 시대 페르시아, 즉 이란은 식민지배를 직접 받지는 않았지만, 서구 열강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신세였다. 당시 페르시아를 지배하던 카자르 왕조는 노쇠하고 부패했다. 이에 헌정운동이 일어나 입헌군주제 헌법이 제정되고, 의회가 설립되는 등 근대화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대내외 사정이 순탄한 발전을 가로막았다. 왕실은 무능하고 부패했으며, 외세와 결탁해 의회를 해산하는 등 자신의 이익과 안녕만 추구했다. 이에 반발하는 무장세력이 난립해 나라는 혼란 그 자체였다.


이때 등장한 것이 레자 샤 팔레비다. 그는 1925년 영국의 묵인하에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팔레비 왕조를 창건했다. 이 책 『나의 몫』에서 마수메의 남편 하메드가 혁명 운동을 하던 때는 바로 이 팔레비 왕조의 두 번째 왕, 레자 샤의 아들 모하메드 레자 샤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레자 샤 부자는 근대화와 세속화를 추진했다. 철도를 깔고 교육개혁을 추진했으며, 히잡을 금지했다. 탈(脫) 이슬람을 추진한 것이다. 그러면서 2차 대전 후에는 미국의 맹방으로 각종 군사장비와 원자력 발전 기술 등을 지원받았다. 따라서 자연히 이스라엘과도 아주 친한 나라가 되었다.


팔레비 왕조는 뿌리가 미천했다. 그래서 고대 페르시아와의 연결 고리를 만들어냈다. 팔레비란 명칭 자체가 고대 사산왕조에서 사용된 중기 페르시아어인 ‘팔라비어’에서 따온 말이었다. ‘이란’이라는 국명도 이때 도입된다. 이란은 ‘아리아인의 땅’이라는 뜻으로 고대 페르시아제국 시대부터 스스로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 것이라고 한다. 즉 팔레비왕조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꺼내든 ‘국명’인 것이다.


팔레비 왕조는 세속화를 추진하면서 고대 페르시아제국의 뿌리에 닿기 위한 노력으로 조로아스터교의 전통을 되살리는 프로젝트도 추진했다. 대표적인 것이 1971년 페르시아제국 건국 2,500주년을 축하한다면서 고대 유적지 등에서 대대적인 행사로 벌인 ‘페르세폴리스 기념식’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왕조의 종말을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무능과 부정부패, 그리고 비밀경찰 SAVAK에 의존하는 억압적 체제 등은 이미 혁명의 불씨를 키우고 있었고, 호화로운 대규모 행사는 오히려 국민 대중의 반감만 키운 것이다.


결국 혁명이 일어나고 왕조는 무너졌다. 마수메의 남편 하메드는 왕조를 무너뜨린 혁명가들 중 한 사람으로 ‘영웅’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돌연 좌파 사회주의자란 이유로 혁명의 적으로 몰려 투옥된다. 마수메는 꽤나 영향력이 있는 시아버지와 함께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면서 수소문한 끝에 남편이 수감된 곳을 알아낸다. 그렇게 해서 천신만고 끝에 찾아갔지만, 교도소 당국은 면회는커녕 남편 하메드의 ‘유품’이라며 보따리 하나를 툭 던져주고 마수메 일행을 내쫓다시피 한다. 즉 하메드는 이미 처형되었고, 그의 시신도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소설의 묘사는 여기에서 그친다. 그러나 여기에는 현 신정 정권의 정당성을 부정하게 되는 역사적 사실이 숨어있다. 당시 혁명의 전개 상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이렇다. 1977년 지식인 언론계 학생 등을 중심으로 반정부 목소리가 크게 높아졌다. 그것이 이듬해 대규모 시위로 확산된다. 이렇게 해서 유혈 진압과 시위 격화의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시위는 ‘카스르 참사’에 이어진 ‘검은 금요일’ 사건을 계기로 결정적으로 폭발한다. 카스르 참사란 정치범과 시위 주동자들이 갇혀 있던 테헤란 시내 카스르 교도소 앞에서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하면서 수십 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게다가 이와 함께 교도소 내의 잔혹행위들까지 낱낱이 밝혀지게 된다. 국민적 분노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검은 금요일’은 카스르 사건 얼마 후인 9월 8일 테헤란 잘레 광장에서 군이 발포해 수백 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결국 이듬해인 1979년 1월 팔레비 국왕이 해외로 망명한다. 이와 함께 15년간 해외에 망명해 있던 이슬람 지도자 루홀라 호메이니가 2월 1일 귀국한다. 그리고 군대 일부와 반정부 세력이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마침내 2월 11일 혁명 승리를 선언하면서 왕정이 최종 붕괴된다. 마수메의 남편 하메드도 영웅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때 이미 혁명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왕정 붕괴 후 한 달 반 정도 지난 3월 말 ‘이슬람공화국 수립’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된다. 결과는 찬성 98%로 가결. 체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공개적인 토론도 별로 없이 “이슬람공화국에 찬성하십니까?”란 설문 하나밖에 없었다. 98% 찬성이라는 것은 공산독재에서나 가능한 일 아닌가? 그와 함께 마수메의 남편도 영웅에서 하루아침에 ‘반혁명분자’로 전락해 버린다. 즉 전국적으로 일사불란한 체계를 갖추고 있던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 성직자들이 주축이 된 세력이 세속 민족주의,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사회주의 등 혁명을 이끈 다양한 성향의 세력 집단을 몰아내 버리고 대중 혁명을 이슬람 혁명으로 둔갑시켜 버린 것이다.


호메이니를 정점으로 하는 이슬람 세력은 팔레비 왕조의 비밀경찰 SAVAK 조직을 재빨리 흡수해 이슬람혁명의 ‘보위부’로 활용했다. 이 조직은 SAVAMA로 불리다가 1984년 공식적으로 이란 정보부(MOIS)로 재편된다. 왕조시대보다 더 강력한 비밀경찰, 더 강력한 억압체제를 갖춘 것이다. 군의 일부와 추종세력을 규합한 혁명수비대는 정규군과는 별도로 강력한 친위 무력이 되었다. 그 결과 이슬람 세력 이외의 그룹은 모두 숙청되거나 해외로 망명했다.


1979년 12월 호메이니를 권력의 정점으로 하는 이슬람 신정국가체제를 규정하는 헌법이 제정됨으로써 오늘날의 이란이 탄생했다. 팔레비 왕조 시대에는 억압은 있었지만, 다른 종류의 자유도 있기는 있었다. 즉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 미국식 문화가 자리를 잡아 예컨대 음악, 술, 복장, 여성의 활동 등에서는 폭넓은 자유가 허용되었던 것이다. 이슬람공화국은 이런 것들까지 이슬람 정신을 훼손하는 것이라 하여 핍박한다. 그런 문화의 발상지이자 이전 팔레비 왕정을 지원했던 미국은 ‘사탄’이므로 파멸시켜야 한다. 이스라엘도 그러한 ‘사탄’의 앞잡이이므로 멸절 대상이다. 그래서 이슬람공화국 이란은 미국과 이스라엘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보고,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이른바 ‘그림자 전쟁’이다.


남편을 잃은 마수메의 두 번째 불행은 좌파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큰 아들이 수배자가 된 것이다. 아들과 남편이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된 셈이다. 마수메는 브로커를 통해 아들을 국외로 도피시킴으로써 그를 지켜낸다.


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 남편과 큰 아들에 이어 둘째 아들이 사라진다. 1980년 발발해 8년간 계속된 이란-이라크 전쟁에 징집돼 나가 행방불명이 된 것이다. 마수메는 또다시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수소문을 하지만 답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해피 엔딩이다. 아들이 포로 교환으로 생환한 것이다.


마수메의 불행은 이것으로 끝이 나고 이제 평온한 노후가 열릴까? 만약 그렇다면 작가는 이 소설을 쓰지 않았을 것 같다.

그녀의 첫사랑이 기억나는가? 그가 돌아왔다! 미국으로 이주했던 그는 불행한 결혼생활 끝에 혼자 귀국한다. 마수메와 소식이 닿았다. 나는 이 대목에서 조금 실망했다. ‘그래 이렇게 뻔한 해피 엔딩으로 가는구나…’


그러나 아니었다. 짐작하듯이 그 ‘명예’의 망령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자녀들의 명예가 걸렸다. 심지어 해외로 탈출해 독일에서 공부하고 결혼까지 한 큰 아들이 가장 강경하게 이슬람 가치관에 따른 명예를 들고 나온다. 나이 든 여자가 기도와 봉사로 무슬림 여성다운 여생을 보내야지 사랑 타령이 무슨 당치 않은 소리냐는 것이다. 결국 마수메는 오랜 기다림 끝에 소식이 닿은 첫사랑을 한번 만나보지도 못하고 포기하고 만다.


마수메의 ‘몫’은 그러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억압’의 사슬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지를 얽어 매고 있는 것이다. 그 억압은 SAVAK라는 비밀경찰을 통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옥죄어온 왕정시대나, 이슬람의 고귀한 가치를 내세워 여성은 히잡을 씌우고 남성은 성전-지하드로 내몰아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묶어두고 있는 신정시대나 변함없는 현실로 굳게 자리 잡고 있다. 레자 샤만 호메이니로, 호메이니가 다시 하메네이로 바뀌었을 뿐 그 억압의 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공고해졌다. 왕의 위세에 신의 권위가 덧붙여져 그 억압은 상상을 초월한다. 마수메의 삶은 그렇게 이어진다.


“내가 무슨 권리로 아이들의 명예를 더럽히려 한단 말인가. 내가 원했던 건 조금의 행복이었는데, 그 마저도 이 세상은 내게 허락하지 않았다.”


이란의 현대사와 마수메라는 한 여성의 삶을 양쪽 바퀴로 해서 삐걱거리며 굴러가는 수레처럼 『나의 몫』은 먼 길을 왔다. 그 종착지는 이렇듯 허무하다. 절망의 바닥까지 내려와 이제 올라가나 싶었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지하로 떨어지는 형국이다. 명예는 무엇이고, 신앙의 가치는 무엇인가? 그 ‘조금의 행복’도 허용하지 못한다면 명예와 신앙은 무슨 가치가 있을까?


이것은 이란 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세상의 모든 공동체는 저마다의 SAVAK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


『천 개의 찬란한 태양』/할레드 호세이니/현대문학/2022

할레드 호세이니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표지

『천 개의 찬란한 태양』(A Thousand Splendid Suns)은 1960년대부터 2000년대 초에 이르는 아프가니스탄의 격동기를 살아내는 두 여성의 이야기다. 『나의 몫』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억압의 스토리이지만, 역사의 큰 흐름보다는 가정 내부의 상황에 더 집중한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접근 방식이 다르다. 따라서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으로 각기 다른 나라 이야기이지만, 이슬람 사회의 여성에 대한 억압이란 측면에서는 상호보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즉 이 두 작품이 함께 또 다른 하나의 서사(敍事)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저자인 할레드 호세이니는 아프가니스탄 외교관의 아들이다. 그의 가족은 아버지의 임지인 프랑스 파리에서 살고 있다가 1980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귀국하지 못하고 망명자가 되어, 미국에 정착하게 된다. 이에 따라 작가는 미국에서 자라면서 의과대학을 나와 내과의사가 된다. 이후 글쓰기를 병행하다가 2003년 데뷔작 『연을 쫓는 아이들(The Kite Runner)』이 크게 성공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이후 글쓰기에 전념한다. 이 작품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그의 2번째 장편소설로 전작만큼이나 큰 성공을 거두면서 세계 많은 나라에 번역, 소개되었다. 이 두 작품과 세 번째 작품 『그리고 산이 울렸다』 등은 모두 국내에 번역판으로 나와 있다.


먼저 등장하는 여주인공은 마리암이다. 그녀는 부자인 아버지의 사생아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지만,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어머니와 함께 외딴집에서 살아간다. 그러다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아버지에게 실망한 어머니가 비관 자살하는 바람에 혼자 남게 된다. 결국 아버지는 마리암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지만, 집안에서는 골치 아픈 사생아를 처리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45세의 신발 수선공 라시드에게 강제로 시집을 보내 버린다. 그때 마리암의 나이는 15세.


온갖 폭언과 폭력을 견디며 암울한 세월을 견뎌낸 마리암에게 새로운 시련이 닥친다. 라일라라는 어린 여성이 들어온 것. 라일라는 탈레반 정권 이전에 유복한 가정에서 자유를 누리며 자랐지만, 전쟁 통에 부모를 잃고, 자신도 부상을 입은 채 라시드의 가정에 입양된 것이다. 우정을 넘어 사랑으로까지 발전했던 상대 소년 타리크와도 소식이 끊어진 것은 물론이다.


라시드는 라일라를 두 번째 아내로 삼으려 하고 실제 범하기도 한다. 마리암과 라일라는 그렇게 라이벌 관계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마리암은 라일라를 돌보는 어머니나 언니 같은 존재가 된다. 내전에서 탈레반 정권이 들어서는 격동기에 경제는 피폐해지고 라시드의 생활도 어려워지자 마리암과 라일라는 더욱 심한 폭력과 억압에 시달린다. 그것을 견디면서 두 사람은 동지애로 뭉쳐 함께 그 고난을 견뎌낸다.


인상 깊은 것은 두 사람의 탈출 장면이다. 탈레반의 원리주의식 회교 율법 강요로 여성은 남성 보호자 없이는 여행을 할 수 없다. 마리암과 라일라는 모아둔 돈을 들고 집을 나서 멀리 떠나려 하지만, 남성 보호자가 없어 차표를 살 수 없다. 그래서 주변을 모색한 끝에 아주 착해 보이는 한 남성을 지목한다. 얼마간의 돈을 주고 보호자 역할을 맡아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 남자는 친절하게 승낙을 하고, 두 여인을 안심시킨 뒤, 당국에 신고해 버린다. 탈출극은 허무하게 막을 내리고, 다시 끌려들어 간 집에는 더 지독한 폭력이 기다리고 있다.


라일라의 옛 연인 타리크가 살아 돌아온다. 여기에 격분한 라시드는 미친 듯이 폭력을 휘두르고 라일라는 죽음 일보 직전으로 몰린다. 마리암은 라일라를 구하기 위해 라시드를 둔기로 내리쳐 살해한다. 살인범으로 사형을 감수하는 것이다. 이런 마리암의 희생 덕분에 라일라는 새 삶을 찾게 된다.


이 책은 읽는 내내 그 지독한 억압과 폭력에 진저리를 치게 된다. 『나의 몫』에서 금과옥조로 들먹여지는 ‘명예’라는 것이 겉으로 지켜지는 것처럼 보이는 이면에는 벽 뒤에 가려진 가혹한 억압과 무자비한 폭력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벽 뒤의 일에는 가장의, 또는 남편의 권리라는 미명 하에 아무도 개입할 수 없다. 어떤 폭력이건, 그 폭력에 여성들은 맨 몸으로 고스란히 노출되는 것이다.


보호자 노릇을 해 주기로 하고 앞으로는 돈을 받고 뒤로는 밀고한 ‘착해 보이는’ 남자도 탈레반의 기준에서는 비열한이 아닌 신실한 신자이며, 훌륭한 시민이다. ‘명예’와 율법이 훼손되지 않도록 지킨 사람인 것이다.


소설의 제목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사이브 타브리즈(Saib-e-Tabrizi)라는 17세기 페르시아 시인의 시에서 따온 구절이다. 원문은


“그녀의 지붕 위 무수한 달, 그리고 벽 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헤아릴 수 없으리…”.


여기서 ‘그녀’란 카불을 가리키는 것으로 시 구절 자체는 카불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것이다. ‘태양’은 생명 따뜻함 에너지 희망을, ‘천 개’란 무수함을 각각 뜻한다. 즉 이름 없이 고통받는 무수한 여성들을 뜻하며, 나아가서는 ‘억압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여성들의 찬란한 인내와 연대’를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마리암의 삶이, 속절없이 잊힌 것이 아니라, 카불의 벽 뒤에 숨어 있던 찬란한 태양처럼, 라일라의 삶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노래하는 것이다.


비열한 ‘명예’의 ‘끝판 왕’ 「더 스토닝」


진저리가 쳐지는가? 아직 멀었다. ‘끝판 왕’이 남아있다.


‘명예’를 지킨다는 구실로 백주 대낮에 인간 말종의 가장 비열한 행위가 버젓이 행해진 충격적인 스토리가 있다. 더욱이 이것이 실화라는 사실에 말문이 막힌다.

바로 영화 「더 스토닝」이다.

원제는 「The Stoning of Soraya M. 」, ‘소라야 M의 투석형’이다. ‘투석형’, 즉 돌로 쳐서 사람을 죽이는 형 집행 방식이다.


영화는 이란 출신 프랑스 언론인 프리든 사헤브잠의 실화 르포를 바탕으로 제작된 2008년 작품이다. 감독과 출연 배우 거의 전원이 해외로 망명 또는 이주한 이란인들이며, 미국에서 제작되었지만, 사용언어도 ‘파르시어’, 즉 페르시아어다. 말하자면 미국에서 제작된 이란 영화라고 할 수도 있는 셈이다. 국내에는 2012년 「더 스토닝」이란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스토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무대는 이란의 한 시골 마을. 프랑스기자가 이란에서 취재를 마치고 자동차로 귀로에 오른다. 여행 중 차가 고장이 나고, 수리를 위해 문제의 마을에 잠시 머물게 된다. 그런데 마을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 그리고 거기서 한 여성의 비밀스러운 증언들 듣게 된다. 그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라, 그는 도망치듯 마을을 빠져나온다. 영화는 그 여성의 증언을 재구성해서 보여주는 방식이다.


한 남성이 젊은 여성을 아내로 맞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는 이미 결혼을 한 몸이다. 두 집 살림을 하기에는 경제력이 모자란다. 그래서 아내 소라야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소라야는 이혼을 할 수 없다. 이슬람 사회, 특히 손바닥만 한 시골 마을에서 이혼녀는 인간 대접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녀도 넷이나 딸려 있다. 마을 성직자가 남편의 부탁을 받고 소라야를 설득한다. 이 인간은 한 술 더 뜬다. 소라야에게 자기와 같이 살자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설득이 되지 않자, 남편은 꼼수를 부린다. 소라야를 불륜으로 몰아 죽이기로 작정한 것이다. 마을 지도자,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이장쯤 될지도 모르겠다, 그 지도자도 공모에 가담한 듯하다. 소라야에게 마을 홀아비의 가사를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파트타임 가사도우미라고 할까… 그렇게 소라야는 홀아비집을 들락거리게 되고, 이를 빌미로 마을 지도자와 남편, 성직자까지 가세해 이들을 불륜으로 몰아버린다.


불륜이 발각되면 여자는 율법에 따라 돌에 맞아 죽어야 하지만 남자는 깨끗하게 인정하고 참회하면 끝이다. 그래서 홀아비는 소라야의 남편과 마을 유력자들의 끈질긴 설득과 협박에 못 이겨 불륜을 저질렀다고 거짓 고백을 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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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스토닝」 리뷰(결말 있음)


마을의 그 누구도 이 말도 안 되는 음모에 저항하지 못한다. 서슬 퍼런 율법이 있고, 거기에 반론을 제기했다가는 사회적인 매장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가족들까지 입을 다물고 소라야는 돌에 맞아 목숨을 잃는다. 땅을 파서 몸을 반쯤 묻고, 가족들이 먼저 돌을 던진다. 소라야의 아들이 돌로 어머니를 맞추고, 이어 모든 마을 사람들이 돌을 던져 살해한다. 소라야의 죄목은 불륜으로 남편과 그 가문과 마을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 무고한 여성을 돌로 쳐 죽임으로써 마을의 ‘명예는 회복되었다.’




신정(神政) 국가 이란에서 이슬람 율법 샤리아를 그대로 실생활의 법으로 적용하는 원리주의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다시 이란의 한 시골 마을에서 이번 여정을 마친다. 이 영화를 보면, 『나의 몫』을 읽고 분개했던, 또는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읽으면서 진저리 쳤던 것이 머쓱해지는 느낌마저 든다. “뭐 그 정도를 가지고 그래? 이런 막장도 있는데…”라면서 의아해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슬람 사회의 모든 여성이 이들 작품 주인공처럼 처절하게 학대받는 것도 아니고, 모든 남성이 이처럼 악랄하게 핍박하는 것은 아니다. 선진국이라고 해서 가정에서 학대가 없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한쪽은 학대가 별다른 제어 없이 일상적으로 가해질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져 있고, 다른 쪽은 그 반대라는 점이 결정적인 차이다.


억압은 사람들을 침묵시키고, 그 침묵 속에서 모두를 공모자로 만든다. 그러나 침묵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마수메가 말을 하고, 마리암은 폭력을 응징하며, 라일라는 탈출하고, 소라야의 고모는 용감하게 증언한다.

소라야의 마을 사람들이 모두 말도 안 되는 공모에 가담해 침묵을 지키며 공범이 되는 것은 그들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율법을, 이웃을, 마을 지도자를, 종교 지도자를… 2025년 이란의 최고지도자 하메네이가 "위대한 국가 이란이 시온주의자의 가짜 정권(이스라엘)에 승리를 거둔 것을 축하한다."며 말도 안 되는 수사(修辭)를 버젓이 늘어놓을 수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두려움 속에서 모두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침묵은 어느 한 사람의 나직한 목소리에도 깨질 수 있다. 그것이 깨지는 순간, 모든 것은 산산이 부서진다. 마리암이 라시드를 쳐 죽이는 것이 바로 그 순간이다.


천 개의 태양은 여전히 벽 뒤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i] 후세인 이븐 알리(Ḥusayn ibnʿ Alī/626? ~ 680)


마호메트의 외손자로 이슬람 시아파 3대 이맘. 680년, 카르발라 전투에서 옴미야 왕조(야지드 1세)에 저항하다 처형되고 그의 가족과 추종자들은 집단 학살당했다. 이로써 그는 시아파가 추구하는 ‘불의에 맞선 정의’를 상징하는 순교자로 시아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핵심 인물이 된다.

이란, 특히 호메이니 체제는 그의 순교’를 대중동원과 정치정당성의 서사(敍事)로 적극 활용한다. 그의 ‘순교’를 기리며 복수를 다짐하는 일종의 추모제인 ‘아슈라’는 이란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 및 정치적 행사다. 모두가 자기 몸을 치면서 울부짖는 집단 행진은 아슈라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모습이다. 이때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정도가 신앙의 척도로 여겨진다. 이 때문에 맨살을 드러낸 등을 채찍으로 후려쳐 피투성이가 되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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