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녀원의 비밀

『위대한 침묵』에서 『이처럼 사소한 것들』까지

by 제이슨

수녀님과 생김치


김장하는 날.

먹거리가 풍족하지 못했던 시절 김장은 집안의 중요한 연중행사 중 하나였다. 우리 집은 식구가 많았다. 우리 형제 6남매에다 일하는 형, 누나들까지.

김장.jpg 대가족의 김장은 집안의 큰 연중행사였다.

1960년대.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나라를 재건하던 시기다. 너도 나도 먹고살기 힘들었고, 특히 오갈 데 없는 전쟁고아들이 많았다. 그들은 어릴 때는 고아원에 있지만, 나이가 차면 대책 없이 사회로 나와야 했다. 젊은 전쟁미망인도 많았다. 그래서 이들은 조금 ‘먹고살만한 집’에서 가정부나 머슴처럼 일하면서 더부살이를 했다.

우리 집은 가게가 두 군데라 일손이 필요하긴 했지만, 사람을 고용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 오갈 데 없는 이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고 세끼 밥을 먹을 수 있게 해 준다는 차원에서 여럿을 받아들였다. 밥하고 빨래하는 19살 누나부터 짐 나르고 온갖 잡일 하는 27~28세 형들까지. 때로는 ‘이모님’도 계셨다. 이들은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10여 년을 한 식구로 살았다. 그들 중 몇몇은 훗날 결혼해서 가정을 꾸린 다음에도 우리 집을 ‘친정’, 또는 ‘고향집’이라며 명절마다 자녀들을 데리고 찾아오기도 했다.

아무튼 이렇게 식구가 많다 보니 김장은 정말 큰 일이었다. 배추는 시골에서 소달구지로 가득 실어왔다. 이걸 내려서 정리하는 것부터 예삿일이 아니었다. 김장하는 날 학교에서 돌아오면 갈 곳이 없었다. 온 집이 배추와 양념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웃집 아주머니들까지 품앗이로 총동원되었다. 그래서 집안은 여인네들의 수다와 웃음으로 가득 찼고, 아이들은 덩달아 신이 났다. 그 사이를 비집고 다니면서 갓 버무린 생김치를 죽 찢어 입에 넣어주는 것을 받아먹으면 매워서 눈물이 찔끔하면서도 재미있고, 맛있었다. 그것을 따끈따끈한 쌀밥에 척척 얹어 먹는 맛은 또 얼마나 기가 막혔던지!

그런 생김치 먹는 것을 어느 날 금지당했다.

7살 때 교통사고로 크게 다쳤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래서 나는 성장기에 남들보다 병원 신세를 많이 졌다. 한 번은 파티마병원에 있었다. 이름이 말해주듯 가톨릭 재단의 병원이다. 간호사 중에 외국인 수녀님들이 계셨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퇴원하는 날 주의사항을 외국인 수녀님이 영어식 억양과 발음이지만, 유창한 한국어로 말씀해 주셨다.

“생김치 먹지 마세요. 꼭 익은 다음에 먹어야 해요.”

그렇게 수녀님과 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했다.

그다음? 한 번도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나는 생김치를 좋아한다. 익은 김치보다는 차라리 겉절이가 좋다. 김치찌개도 ‘묵은지’ 김치찌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김치도 김장날과 그 이후 얼마동안 즐겨 먹지만, 익기 시작하면 거의 먹지 않는다. 그래서 장단기 해외여행이나 출장을 다니면서도 김치를 그리워한 적이 별로 없다. 아마 김장 당일만 생김치를 잡수시고 다시는 김치를 찾지 않았다는 그 ‘전설적인’ 아버지를 닮은 모양이다.


위대한 침묵


수녀님들의 외출복은 참으로 아름답다. 단순하지만 검은색과 새하얀 색의 조화는 완벽하다. 거기에서 풍기는 정결과 신앙, 박애와 봉사 등의 이미지는 저절로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앞서 말했듯이 파티마 병원에 있을 때도 간호사 수녀님이 너그럽고 친절해서 너무 좋았다. 물론 엄격할 때는 매우 엄격하셨다. 그래서 잘 따랐고, 선물도 받았는데… 생김치 금지 사건으로 심통이 많이 나버렸다.

그런 수녀님들이 수련하고, 수도하는 수녀원이란 어떤 공간일까? 그렇다면 수도원은 또 어떤 공간일까? 신비감을 준다. 엄격한 신앙의 정진, 일생을 바치는 그 비장함. 속세와 떨어져 있기 때문에 더 궁금하고,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위대한 침묵’.


2005년 독일의 필립 그뢰닝(Philip Gröning) 감독이 만든 162분짜리 다큐멘터리 영화다. 수도원. 그중에서도 가장 엄격한 수도 생활을 하는 곳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그 생활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작품이다. 그곳은 바로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 수도사들이 철저한 고독과 침묵 속에서 생활하는 곳이다. ‘묵언 수도원’이라고 할까…

다큐영화 「위대한 침묵」 포스터

ㄴ영화는 인터뷰 내레이션 배경음악 등 아무것도 없이 철저히 수도사들의 일상을 묵묵히 따라가면서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영화도 ‘묵언 영화’인 셈이다.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은 프랑스 남동부 알프스산맥 자락, 그러노블 북쪽에 있는 카르투시오 수도회의 본산이다. 1084년 독일 쾰른 출신의 성 브루노가 설립했다. 수도사들은 하루 대부분을 개인 독방에서 기도와 묵상으로 지낸다. 말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단체 미사 등의 시간에는 꼭 필요한 말은 할 수 있다. 외부인 방문은 물론 금지다. 그뢰닝 감독은 요청한 지 16년 만에 촬영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6개월간 실제로 수도원에 머물며 영상을 찍었다. 한시적으로 묵언 수행 수도사 생활을 직접 경험한 셈이다.

영상을 통해 보는 수도원의 생활은 인상적이었다. 대화도 설명도 없다. 그냥 수도사의 삶을 영상을 통하여 말없이 체험하는 것이다. 재미없고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이곳 수도원과 수도사의 삶을 설명하는 최선의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공간이나 기록물이 아니라, ‘침묵’과 ‘존재’ 자체를 사유하게 만드는 철학적·미학적 체험”이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다.

이들에게 침묵은 ‘외부의 소음을 차단하는 도구’이자 ‘내면을 향한 길’이다. 하느님과 직접 대화하기 위한 조건으로 선택된 것이 침묵이란 뜻이다. ‘말’은 세속적 욕망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수도자에게는 그 ‘말’ 조차도 금욕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침묵하는 이유다.

흔히 ‘기도’라고 하면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을 떠올린다. 나와 내 가족이 건강하기를, 하는 일이 잘 되기를, 부자 되기를, 아이들이 좋은 대학 가기를,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를, 병이 낫기를… 기독교에서는 기도를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고 ‘요구’만 할 것이 아니라, 입을 다물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리 생각하니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의 모든 것이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위대한 침묵’ 한국판도 나왔다. 카르투시오회가 한국에도 수도원과 수녀원을 설립했고, 그 수도원의 모습이 TV 다큐멘터리로 제작된 것이다. 2019년 KBS에서 3부작으로 방영되었고, 이듬해 영화판으로도 만들어져 개봉된 바 있다.

다큐영화 「위대한 침묵」 예고편

『이처럼 사소한 것들』과 『필로미나의 기적』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은 법.

모든 것에는 밝은 이면에 어두운 면이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다. 또한 인간의 고약한 심보는 굳이 그런 것만 찾아서 까발리고 싶어 하고, 사람들의 관심은 유독 그런 곳에 집중된다. 그것을 ‘악취미’라고만 하기도 어려운 것은, 선하고 고결할 것으로 믿었던 것에 추악한 면이 있었다는 데 대한 배신감 같은 것이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론의 사명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를 배신하는 것들을 폭로해 여론의 심판을 받게 하는 것.

그 때문일까? 책에는 이런 수도원의 거룩하고 고결한 모습보다는 배신감을 느끼게 하는 부정적인 이면이 많이 나온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클레어 키건/다산책방/2023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 책 표지

짧은 장편, 아니 중편 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도 있을 정도로 분량이 많지 않아 한자리에서 끝까지 읽을 수 있을 정도다. 영화로 만들어졌다. 2024년 팀 밀란츠 감독 작품으로 같은 해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했다. 국내에도 개봉돼 영화를 보고 싶었지만, 어쩌다 놓쳐버렸고, 책을 읽었다.

무대는 1980년대 아일랜드의 한 소도시. 석탄을 팔아 아내와 다섯 딸과 함께 단란하게 살고 있는 주인공 빌 펄롱. 집에서는 가족들이 크리스마스 맞이에 한창이고, 빌은 연휴를 앞두고 곳곳에 석탄을 배달한다. 그러다 지역 수녀원에 이르러 묘한 일을 겪는다. 도움을 요청하는 한 소녀(사실은 미혼모다)를 만나게 되고 그러면서 그의 삶이 ‘바뀌게’ 된다.

소설은 그냥 소소한 일상을 지루할 정도로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소녀와의 만남, 수녀원 측의 ‘신경질적인 반응’ 등도 담담하게 그려진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 독자 감상 평 중에는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란 불평도 좀 있다. 클라이맥스, 반전, 이런 것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독특한 소설이다.

내게는 울림이 컸다. 곧바로 영화 ‘필로미나의 기적’이 떠올랐고, 그러면서 단박에 숨져진 이야기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필로미나의 기적’은 영국의 언론인 마틴 식스스미스가 자신의 경험을 쓴 『The Lost Child of Philomena Lee』를 영화화한 것이다. 미혼모 필로미나 리가 수녀원에 의탁해 있다가 빼앗긴 아기를 세월이 지나 언론인의 도움으로 찾는다는 이야기다.

두 작품은 시대도 형식도 다르지만 공통의 소재를 다룬다. 바로 아일랜드의 막달레나 수녀원이다. 수녀원은 오갈 데 없는 미혼모와 아기들을 보호해 준다. 그러나 실상은 미혼모들을 사실상의 강제노동으로 내몰면서 학대하고, 아기들은 대가를 받고 미국으로 입양을 보낸다.

두 작품 모두 20세기 아일랜드의 가톨릭 사회가 미혼모와 여성에게 가한 억압과 착취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크리스마스 맞이를 준비하는 단란한 가정은 수녀원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 그냥 사소한 일상 속에서 행복하게 살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은 그 참혹한 현실에 맞닥뜨린다. 그리고 ‘행동’을 선택한다. ‘이처럼… ‘의 빌 펄롱은 석탄을 배달하고 집으로 그냥 돌아가면 된다. ‘필로미나…’의 마틴 식스스미스도 수십 년 전에 헤어진 사람 찾는데 도움을 달라는 생면부지의 사람 요청에 굳이 응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두 사람은 외면하지 않았다.

사회의 외면 속에서 그냥 비극에 내동댕이쳐진 사람들. 거기에 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으니, 그것은 모성이다. 어머니는 아기를 품어야 하고, 아기는 엄마 품에서 비로소 안전하다. 그러나 이 두 작품에서는, 아니 실제 해당 수녀원에서는 미혼모들이 아기를 빼앗기고 강제 노동에 가까운 학대를 받는다. 그 이유는 정절을 지키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를 낳는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동을 통해 참회하고 그 죄를 씻어 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해당 수녀원 한 곳의 일탈이 아니라 당시 아일랜드 가톨릭 사회 전체가 이런 문제를 다루는 태도였다. 그러므로 이들 두 작품은 해당 수녀원을 대상으로 하지만, 사실은 당시의 아일랜드 사회상을 고발한 것이다. ‘죄’의 굴레를 씌워 ‘모성’을 짓밟는 만행이 신앙의 이름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된…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예고편
영화 「필로미나의 기적」 예고편


『필로미나의 기적』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해석판’인 것처럼 느껴진다. 아마 나도 『필로미나…』를 보지 않았다면 『이처럼…』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즉시, 그리고 폭넓게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엄마 필로미나 리는 한시도 아들을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는 다만 아들이 엄마를 잊지 않고 있기 만을 바란다. 마틴 식스스미스는 언론인으로서 능력과 인맥, 그리고 기술을 총동원해 마침내 필로미나의 아들을 찾아낸다. 하지만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다. 그러나 필로미나와 마틴은 그가 끝까지 조국 아일랜드와 거기 있을 엄마를 잊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모성은 그렇게 끈끈하고 강인하다.


호스피스 병동에 있을 때였다. 옆 침상에 연세 높으신 할머니가 계셨다. 그분은 가끔 울기도 하셨다. 그런데 꼭 “엄마, 엄마…” 부르면서 우시는 것이다. 나이가 80이건 90이건, 엄마는 언제나 엄마다.


이제 또 다른 수도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책의 세계에서 수도원 하면 단박에 떠오르는 것은 역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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