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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품위있는 그녀 Jul 26. 2024

운동은 남편을 만나게 해 주었다.

흥부에게 제비가 박씨를 물고 오듯 운동은 내게 남편을 만나게 해 주었다.


- 지난 화 마지막 -

그럼 크로스핏은 왜 6개월 하다 끝낸 건지

나와 맞지 않았던 건지 의문을 갖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 죽일 놈에 연애 때문이라고,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BOX에서 한 이별 때문이었다고


내게 운동은 이별뿐만 아니라 지금의 남편을 만날 수 있게 도와준 연결고리다.

그러고 보니 운동이 없었으면 무슨 재미로 20대를 보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크로스핏을 그만두고 에어로빅, 폴댄스, 요가, 필라테스 등 여러 운동을 시도하고 그렇게 몇 년을 운동에 빠져, 또 나 자신에게 빠져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다 2016년 설연휴 저녁. 고등학교 동아리 선배에게 갑자기 연락이 왔다.

명절이라 해도 다를 건 없었다. 필라테스를 다녀온 후 몸이 근질거려 집 근처 공설운동장을 1시간 가까이

걷고 온 날이었다. 그래도 말똥말똥한 정신에 근처 카페에나 다녀오려던 생각이었는데 마침 우리 집 근처라는 선배의 말을 듣고 그날 바로 만남을 가졌다. 5년 만에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묻다 요즘 운동에 빠져 있는 내 일상을 이야기했다. 매일 운동을 가고 하루에 2번 갈 때도 있다고 하니 선배는 자기 주위에 너랑 비슷한 형이 있다며 소개를 시켜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며칠 뒤 그 선배의 선배라는 사람(OH라 지칭하겠다.)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때 난 한참 운동에 빠져 자존감이 전고점을 돌파하는 중이었다. OH에게 온 카톡 메시지를 받고 그의 프로필을 구경하니 내 스타일이 전혀 아니었다. 소개해준 선배 얼굴을 봐서 만나만 봐야겠다 생각하고 토요일 저녁 호프집에서 만남을 약속했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 본 그는 내 취향이 정말 아니었다.(어머님 죄송해요...)

빨리 앞에 놓여 있는 맥주 500을 마시고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오늘도 운동을 하고 와서 피곤하다는 말로 일찍 집에 들어갈 것임을 예고했다.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그 '운동'이라는 말은 나와 그 사이를 이어주는 엄청난 촉매가 되었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이 남자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야근을 마치고도 헬스장에 무조건 출석한다고 한다. 주말에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운동을 다녀온 후 쉰다고 했다. 그의 부지런함과 운동에 대한 애정 어린 말들은 반쯤 문쪽으로 향했던 내 몸을 돌려놓았다.

심지어 그는 담배도하지 않고, 카페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 남자 대화를 하면 할수록 매력이 넘쳐났다.

맥주 500 한잔으로 마무리하겠다는 처음 마음과는 달리 그와의 대화가 너무 즐거워서 맥주 2잔을 더 시켰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난 두 번째 잔을 다 비우고도 아쉬워서 얼음물을 마시며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다음번 약속을 기약하는 그에게 망설임 없이 '알겠다'라고 대답하고 얼마 후 다시 OH와 만난다.

그렇게 OH와의 연애를 시작했다.


OH의 주 운동은 헬스와 농구였다. 평일저녁과 주말오전엔 헬스를 가고, 토요일엔 농구 동호회에서 3 시간 넘게 유산소를 한다고 했다. 평일엔 야근으로 지쳐 잠들고, 주말엔 무료하게 늘어져서 자던 구 남자 친구들과 달리 부지런한 OH와의 연애는 시간이 지날수록 즐거웠다.

OH 역시 "나야? 운동이야?"를 외치며, 운동에 빠져 산다고 타박하던 구 여자 친구들과 달리 주말에 헬스장에 간다니 새벽부터 따라 나와 열심히 하는 내 모습이 좋게 보였다고 했다.

누군가에게는 '왜 저렇게 열심히 해?' '너무 과한 거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우리에겐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애정전선을 더욱 돈독하게 해주는 매개체였다.

1년간의 연애를 끝내고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지금은 OH와 나를 쏙 빼닮은 8살 난 아들도 있다. 그 아들은 우리 부부의 영향 때문인지 농구, 축구, 탁구, 태권도 등 운동을 좋아한다. 외식을 할 때면 샐러드는 사이드로 무조건 시켜서 먹어야 하고, 식사할 때 처음 먹는 음식이 나오면 건강에 어떻게 좋은지 질문한다. 그럴 때 우리 부부는 흠칫하며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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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래동화 흥부놀부에서 우연히 흥부가 다친 제비를 보살펴주었더니, 그 제비가 금은보화가 가득한 박씨 3개를 물어다 주었다.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기 싫어 우연히 시작한 '운동'이, 내겐 흥부놀부의 제비와 같다. 금은보화가 든 박 씨보다 더 소중한 '남편과 아이'를 만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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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해보니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면 더 잘 산다는 어른들의 말이 공감이 된다.

그게 운동이든 아니면 영화나 드라마 취향. 또는 캠핑 등 공통된 관심사가 있는 부부들이 잘 사는 것 같다.

결혼은 해피엔딩만 있는 동화가 아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더 그렇다. 밤낮없이 울어대는 아이를 두고 너무 피곤해서 남편과 내가 서로 일어나기 싫어 눈치 볼 때도 있고, 둘 중 회식이나 출장으로 흔히 말하는 '독박육아'를 하는 날엔 어제의 아군이 오늘의 적이 되는 날이 오기도 한다.

그럴 때 부부가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건 중요한 것 같다.

'저 사람이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나?'라고 생각될 때가 가끔 오곤 하는데, 같이 운동을 하다 보면 스트레스도 해소되고 달아났던 정서적 유대감이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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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우리 부부는 아이가 잠들면 TV로 유튜브를 같이 본다.

주로 '스쾃자세' '데드리프트자세' 같은 헬스에 관한 콘텐츠 위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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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쯤 후에

아니 30년 후에도

헬스장에서 같이 무게를 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있지 않을까?

부디 그러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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