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 다음부턴 좀 덜 미워할게요
급식에 오이가 나오는 날이면, 잔반통은 늘 푸릇푸릇한 오이로 가득 찼습니다.
심지어 어떤 아이는 "선생님, 오이 먹으면 물파스 씹는 느낌이에요"라고도 말했습니다.
그 말에 웃음이 나면서도, 영양교사인 저는 한편으로는 씁쓸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오이는 그저 '싫은 채소'로 각인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오이와 조금 더 친숙해질 수 있을까?'
매번 급식에서 남겨지는 오이를 보며, 그저 먹으라고 권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조금 다른 접근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오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는 것으로 수업의 방향을 바꿨습니다.
수업의 시작은 그림책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여유당 출판사의 '나는요'라는 그림책을 읽어주었습니다.
이 책은 제가 평소에 좋아하는 그림책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다양한 모습들을 동물에 빗대어 이야기하는
주인공을 통해, 아이들과 함께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활동 1. 나의 성격이나 특징을 동물에 비유해 보기.
활동지에 자신의 성격이나 특징이 어떤 동물과 비슷한지 비유해 보도록 하였습니다.
"저의 느긋한 성격은 코알라를 닮았어요"
"저는 고양이와 비슷한 것 같아요"
아이들은 잠시 고민을 하는 것 같더니 나는요 그림책의 속 주인공처럼
자신의 성격을 동물에 비유했습니다.
활동 2. 오이를 이용해 그 동물을 표현해 보는 시간.
준비해 둔 오이를 꺼내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졌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여졌습니다.
오이는 더 이상 '물파스 맛 채소'가 아니었습니다.
귀가 되고, 꼬리가 되고 다리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저보다 훨씬 창의적인 방식으로 오이를 썰고, 붙이고, 세우며 자기만의 동물을 완성해 나갔습니다.
활동이 끝나고, 아이들은 자기 작품을 들고 하나둘 앞으로 나왔습니다.
자신 있게 친구들 앞에서 서서 작품을 소개하는 아이들의 얼굴엔, 뿌듯함이 묻어났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물었습니다.
"혹시 지금 오이를 한 번 먹어보고 싶은 사람?"
놀랍게도 1~2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이들이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급식 시간에 손톱만큼만 먹어보자고 했을 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아이들이었는데...
오이와의 거리는 단지 입맛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걸 저는 깨달았습니다.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가 되었을 때, 오이는 아이들에게 거부감이 아닌 흥미로 다가왔습니다.
물론, 아직 누군가에겐 여전히 물파스 맛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수업을 경험한 아이들에겐, 오이는 그저 싫은 채소가 아니라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도구, 창의력의 재료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경험을 통해 마음을 열어갑니다.
이런 수업이 쌓여 아이들의 식탁도, 내면도 더 풍성해지길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