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지리학자 이푸 투안(Yi-Fu Tuan)은 『공간과 장소』를 출간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공간(space)과 장소(place)를 구분해 설명합니다. 그에게 공간은 아무것도 없는 곳,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곳, 고정적이며 물리적인 곳을 의미합니다. 반면 장소는 사람들의 소통이 발생하는 곳, 이러한 소통이 누적되어 쌓인 곳으로 우리의 삶, 문화, 공동체 등의 흔적과 기억이 내재된 곳을 의미합니다. 이푸 투안에게 공간과 장소는 큰 차이를 가지고 있는 개념입니다. 그에게 장소는 공간을 해석하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 세상을 보는 관점이기도 합니다.
이푸 투안은 특정 장소에 대해 느끼는 유대감, 애정, 집착을 의미하는 토포필리아(topophilia)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토포필리아는 그리스어로 장소를 뜻하는 토포스(topos)와 사랑을 의미하는 필리아(philia)의 합성어입니다. 그는 공간에 특정한 가치를 부여할 때, 공간이 특별한 장소로 변화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왜 자신만의 장소를 갈망하는지, 장소는 우리에게 어떤 힘을 주는지, 공간과 장소는 왜 다른 지를 섬세하게 설명합니다. 그는 『공간과 장소』에서 장소를 다음과 같이 비유하기도 합니다.
“장소란 〈이동 중 정지pause in movement〉하는 곳입니다. 인류를 포함한 대다수의 동물들이 어떤 지점에서 멈추는 경우는 그곳이 바로 모종의 생물학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장소란 편안한 쉼, (생존) 일상에서의 임시정지(pause)가 가능한 공간을 의미합니다. 장소는 생물학적 안정의 공간이며 물리적 안전의 공간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에게 장소란 특정 분위기, 느낌을 가진 공간을 의미합니다. 특정 개인의 사회적 정체와 미학적 취향이 수용되는 공간을 그는 장소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공간, 곧 장소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카페입니다.
카페는 고립된 사람들이 모여 정서적 교감과 공감, 유대와 연대가 가능한 대표적인 장소(place)입니다. 이런 곳에서의 한잔커피는 임시정지(pause)의 시간에서 ‘나’의 발견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곳은 사회정치적 공동체이자 문화예술 생태계의 한 섹터입니다. 실존적 인간을 위한 안식처이기 때문에 지켜야 할 요새, 최후의 보루가 됩니다.
반면 공간(space)은 권력으로 정복하거나 점유할 수 있는 것,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경제적인 것, 수학(x, y, z)으로 설명되는 불변의 절대적인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러한 절대적인 공간에 의해 사람들의 정체성이 형성되며 동시에 규정되기도 합니다. 이 같은 절대적인 공간개념은 근대(modern)를 관통하면서 동시대 도시 풍경을 만들어 냈습니다.
기하학적인 건축물, 절대적이며 권위적인 관공서, 답답할 정도로 보수적인 학교, 도시공간 전체를 점령한 아파트, 자본의 욕망이 그대로 노출된 빌보드의 광장처럼 국가의 권력과 기업의 자본이 만들어 내는 절대적인 공간은 여기저기서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공간들은 우리의 삶을 포위하고 우리의 일상은 이 공간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집니다. 주지하듯이 공간과 인간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공간 속에서 존재합니다. 공간은 구체적인 실체로서 우리의 삶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절대적인 공간에서 개인은 소외됩니다. 소외되어 고립된 개인은 숨을 곳도 쉴 곳도 없어집니다.
이때, 소외되어 고립된 개인을 위한 철학이 등장했습니다. 개인이라는 실존(實存)의 개성, 무한한 자유, 존재의 다양한 취향을 강조하는 실존주의가 등장합니다. 실존주의는 문학과 예술뿐 아니라 건축, 실내디자인처럼 공간기획에 투영됩니다. 절대적인 공간(space)에 인간적인 감성, 실존의 유별난 삶, 비주류 문화를 반영하는 공간, 새로운 장소(place)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실존주의에서 인간이란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분석을 통해 설명될 수 없는 특별한 존재로 설명됩니다. 자유, 책임, 주관으로 모험하고 체험하며 살아가는 별난 존재들입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구호는 실존주의를 설명하는 핵심 경구입니다. 이들에게 절대적인 공간이란 과학과 철학의 위선과 허위, 자본의 야만스런 욕망, 권력의 폭력처럼 불편한 것입니다. 이들은 실존적 개인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실존적 공간이란 반현대적(anti modern, postmodern)인 공간개념입니다. 심지어 불손하며 세속적입니다. 모든 권위적인 것에 반항하는 펑크처럼 이들의 공간문화는 불온하며 미숙합니다. 이들에게 공간은 개인으로서 인간을 최대한 탐하는 아웃사이더들의 공동체를 위한 장소, 쉴 곳을 의미하게 됩니다. 골목에 숨어 있는 도발적 스타일의 카페처럼 비주류의 공간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아지트, 그들 최후의 보루이자 토포필리아(topophilia)입니다.
도시사회학자 레이 올덴버그(Ray Oldenburg)에게 도시의 커피공간은 모두 제3장소(the 3rd place)입니다. 1989년에 출간한 그의 저서 『제3의 장소(The Great Good Place)』에 따르면 ‘제1장소’는 집, ‘제2장소’는 학교와 직장, 그리고 ‘제3장소’는 집, 학교, 직장도 아닌 카페와 같은 상업공간(commercial space)을 의미합니다. 도시에서 상업공간이란 시민 모두에게 개방된 공간은 아닙니다. 공원, 도로처럼 열린 공간(open space)은 아닙니다. 상업공간이란 물품 혹은 서비스의 판매를 위한 공간입니다. 레이 올덴버그의 제3장소는 사회학적 맥락의 사적 공간(private space)과 공적 공간(public space)과는 다른 개념의 공간입니다.
『제3의 장소』가 출간되었을 때, 이 책은 건축가, 도시계획자는 물론 기업가에게도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제3의 장소』에서 개인은 도시에 갇혀 고립된 존재, 외롭고 쓸쓸한 존재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이란 정주와 유목의 틈에서 익명의 존재로 도시를 부유하는 존재들로 설명됩니다. 당시 이들을 위한 공적 공간은 부족했었습니다. 이들을 위한 공간은 카페, 술집, 레스토랑, 책방과 같은 상업공간이 거의 전부였습니다.
1980년대 미국은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사회경제의 구조가 이행되던 시기였습니다. 신자유주의는 경제관련 국가규제의 완화, 공기업의 민영화, 감세, 사회보장의 축소 등을 통해 분배를 줄이고 투자를 늘려 침체된 경제를 회생시키려는 목적을 위한 정책입니다. 그러나 성공적이지는 못했습니다. 인플레이션과 불황, 무역적자, 재정적자, 주식시장의 충격, 골목 상권의 붕괴에 따른 사회경제적 구조의 양극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였습니다. 이때 레이 올덴버그가 말했던 도시의 제3공간, 도시의 영세한 상업공간인 자영업은 경쟁력을 잃고 소멸되기 시작합니다.
당시 카페와 같은 도시의 상업공간들은 예술문화의 공간, 사회적 공적 공간처럼 지역 공동체를 위한 장소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3장소들은 사라졌습니다. 이러한 공간들이 소멸하는 이유는 다음 중 하나, 혹은 세 개 모두였을 것입니다.
(1)경제적 소멸: 그곳에서 제공하는 상품, 서비스의 경제적 가치와 경쟁력의 소멸
(2)문화적 소멸: 트렌드,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매력 요소의 소멸
(3)사회적 소멸: 지역의 세대교체, 지역 공동체 자체의 소멸
한편, 『제3의 장소』가 출간되자 스타벅스 CEO 하워드 슐츠(Howard Schultz)는 이 책을 마케팅의 교과서로 선택했습니다. 『제3의 장소』는 스타벅스의 ‘반면교사’ 였습니다. 스타벅스는 『제3의 장소』의 모든 것들을 차용했습니다. 이러한 장소마케팅 전략으로 언론과 학계의 주목을 받으며 스타벅스는 크게 성공합니다.
스타벅스는 성공한 상업공간이자 성공한 제3장소가 되었습니다. 스타벅스의 표준화된 공간 아이덴티티(Space Identity, SI), 곧 이들이 소비자들에게 제공하려는 공간경험은 미국 (백인) 중산층이 지향하는 문화적 정체성과 동일시됩니다. 이러한 스타벅스의 커피공간은 미국을 넘어 글로벌 상업공간, 제3장소의 모범적인 이미지로서 표준화됩니다. 스타벅스라는 제3공간과 이러한 공간의 분위기, 느낌은 수없이 복제되며 전 세계로 확산되며 주류문화가 되었습니다.
스타벅스와 같은 주류문화의 정체성은 두 가지 반응을 야기합니다. 스타벅스에 대한 공감과 선망의 동일시(identification)와 스타벅스와 같은 주류문화를 거부하며 비판하는 반동일시(counter identification)가 그것입니다. 보통 특정 정체성과 그 정체성의 이미지에 공감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은 그 이유를 철학, 인종, 계급처럼 본질적인 것에서 찾습니다. 스타벅스의 정체성, 곧 스타벅스의 이미지란 (백인) 중산층의 지향성, 대단히 보수적인 여피(yuppie)의 그것과 동일합니다. 이러한 정체성은 그것과 동일시하려는 (다수) 집단은 물론 반동일시하는 (소수) 집단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1990년대 중반, 스타벅스와 같은 주류 커피문화를 거부하며 비판하는 새로운 커피문화가 등장합니다. 스타벅스라는 제3장소에 만족하지 못하는 집단, 스타벅스에 내재한 철학, 인종, 계급의 문제와 한계를 지적하는 (비주류) 집단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기 시작합니다. 도시의 골목에 이러한 실존들을 반영하는 제3장소들이 등장합니다.
스타벅스의 주류 이미지를 거부하는 비주류의 이미지(counter identification)들을 가진 커피공간들이 등장합니다. 1990년대 중반 개업한 카운터컬처, 인텔리젠시아, 스텀프타운의 이미지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2000년대 초반, 도시의 대표적인 제3장소, 곧 카페공간은 글로벌 커피 체인점과 골목의 독립카페로 양분되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일상의 정지를 누렸고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2020년, 예기치 못한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은 공간과 장소의 개념을 혼란하게 했습니다. 사이버공간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입니다. 1984년,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의 SF 소설 『뉴로맨서(Neuromancer)』에 사이버공간(Cyberspace)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했었습니다. 이 말은 인류가 생각했던 공간과 장소라는 개념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복시켰습니다. 『뉴로맨서』에서 사이버공간은 인간의 욕망과 개인의 정체를 모두 투영할 수 있는 공간으로 그려졌습니다.
팬데믹으로 집에 갇혀 버린 사람들은 사이버공간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이버공간은 스타벅스, 카운터컬처와 같은 현실공간과 전혀 다른 공간이었습니다. 사이버공간에서는 철학, 인종, 계급은 물론 나이, 성별, 지역과는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평등한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익명이 보장되는 완벽하게 새로운 공간이었습니다. 사이버공간의 실존주의자들인 사이버펑크가 등장했습니다. 이들은 사이버공간에 열광했습니다. 이때부터 현실공간은 ‘오프라인’으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큰 길가의 스타벅스와 작은 골목의 독립카페들은 모두 오프라인의 그것들로 불리게 됩니다.
오프라인은 팬데믹의 공간, 곧 금지된 공간이 됩니다. 새로운 제3장소, 대안의 공간들이 사이버공간, 온라인공간에 구축되기 시작했습니다. 현실세계(universe)를 초월(meta)하는 메타버스(metaverse)라는 공간이 구축되기도 했습니다. 현실공간, 오프라인의 경험, 체험에 대한 기억은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습니다.
코로나가 현실공간을 점령했던 시대, 그때는 인간의 몸, 오감(五感)이 제한되는 #비대면 #격리 #감시의 시대였습니다. 이때 우리의 오감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다양한 현상학적 경험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포스트코로나(Post Corona)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다시 인간의 시대가 시작된 동시에 인간의 #활동 #접촉 #관계가 시작되었습니다.
실제 존재하는 길이(x), 너비(y), 깊이(z)처럼 3차원의 좌표 설정이 가능한 커피공간, 현실공간 속 제3장소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다시 오감(五感), 미각, 후각, 촉각, 시각, 청각을 동원해서 한잔커피를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사람들은 이러한 현실공간, 오프라인의 커피공간, 제3장소와 토포필리아의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합니다.
포스트코로나 시대, 삶의 지속가능성은 인류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로 등장합니다. 물론 지속가능성이라는 개념은 오래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은 인류 삶의 취약함을 여지없이 노출하게 했습니다. 지속가능(sustainable)이라는 형용사는 모든 용어의 접두사가 되어줍니다. 지속가능 커피는 물론 지속가능 건축, 디자인처럼 지속가능이라는 접두사에 의해 용어는 완벽하게 다른 뜻이 됩니다. 이때 지속가능 커피를 위한 지속가능 커피공간들이 탄생하기 시작합니다.
역사적으로 오프라인의 커피공간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토포필리아’였습니다. 카페는 인간이라는 다양한 정체의 실존들이 자기의 정체를 확인하고 의지하는 거의 유일한 제3장소입니다. 포스트코로나 이후, 이 시대의 실존들을 위한 지속가능의 커피공간, 제3장소, 토포필리아가 등장했습니다. 이는 포스트코로나라는 시대정신과 이에 따른 메가 트렌드의 반영입니다. 아래 사진이미지의 분위기, 느낌은 동시대 트렌드, 곧 생태환경주의, 리사이클, 업사이클, 순환경제, 지속가능 디자인처럼 오늘의 시대정신이 반영된 커피공간 사례입니다. ☕■
#레이 올덴버그 #제3의 장소, 소멸 #디지털 시대, 외로움 #사회적 연결 #유기적 커뮤니케이션
WHY WE'RE ALL LONLEY | Third Place Theory Explained
*영상제작: Unraveling Architecture, *2024, *7분, *영어(한국어 자동자막 설정 필요)
https://www.youtube.com/watch?v=iNdCrFp0Ow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