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연의 일부입니다. 대자연은 나를 낳고 길러 준 어머니와 같은 곳입니다. 자연과 인간은 불가분적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총체적인 삶과 함께 인간의 과학, 철학, 사회, 경제가 결국 자연으로 환원되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충동에 이끌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래 사진 이미지와 같은 카페에서의 한잔커피는 이러한 본능을 달래며 지연시킵니다.
과거 자연은 신(神)의 창조물로 이해되었습니다. 자연은 신의 의도에 따라 디자인되었고 그의 목적에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600년대 초반, 철학자 데카르트는 인간과 자연의 새로운 관계, 기계론(mechanism)을 제시합니다. 데카르트의 기계론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시공간을 관통하며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핵심 철학으로 존재합니다. 기계론적 자연관이란 자연은 인간을 위해 조정, 통제될 수 있으며, 신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라는 세계관입니다. 기계론적 자연관에 따르면 자연은 정량 가능한 대상, 결정론적 인과율에 따르는 대상일 뿐입니다. 인간이 기계를 관리, 지배, 제어할 수 있듯이 자연도 그럴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철학입니다.
데카르트는 자연이란 과학적으로 대상화될 수 있는 것, 곧 자연은 기계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자연의 일부인 인간은?” 그는 대답합니다. 인간은 자연과 같은 기계와는 다른데 기계는 영혼이 없고 인간에겐 영혼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때 인간은 자연에서 분리됩니다. 문명인과 자연인은 다른 종류의 인간이 됩니다. 그렇다면 “인간과 동물은?” 동물은 영혼이 없기 때문에 기계라고 말합니다. 통제는 물론 도살 후 식용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신대륙의 원주민들은?” 그들은 동물에 가까운 야만인이기 때문에 죽여도 죄는 아니지만, 노예로 활용하는 것이 그들을 위한 것이며, 더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처우라는 대답이 가능해집니다. 이러한 기계론은 당시 커피경작에 적용됩니다. 1600년대 말부터 시작된 커피 플랜테이션 농업은 자연을 파괴하고 원주민과 아프리카 노예노동을 착취하는 반자연적이며 비문명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데카르트와 같은 기계론적 자연주의는 이러한 만행을 합리화합니다. 1700년대와 1800년대의 한잔커피, 이러한 커피를 즐기는 당시 귀족, 철학자, 예술가들의 무감각은 당시 유럽 철학을 관통하고 있었던 철학과 유관합니다. 기계론적 자연주의는 유럽인들이 한잔커피의 여정에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였습니다.
당시 서양철학의 핵심은 인간과 자연, 영혼과 육체, 동양과 서양, 남성과 여성의 구분과 같은 이원론(dualism)입니다. 이후 이러한 이원론은 동시대 (산업)사회, (자본)경제, (모더니즘)문화의 깊은 뿌리가 되었습니다. 특히 인간과 자연의 구분과 분리는 동시대 기후위기로 대표되는 다양한 환경적 참사의 전주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기계론적 자연관에 어떠한 문제제기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1700년대 철학자 루소(Rousseau)는 기계론에 경도된 사람들에게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루소의 철학은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자연관을 비판하는 유기론적 자연관입니다.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주장을 했지만 이 ‘자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었습니다. “산, 들, 바다와 같은 자연!”, “자연의 깨끗함과 순수함!”, “자연 속의 평등과 평화!”, “반(反)문명!”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해석했습니다.
1886년, 생태학이 등장했습니다. 독일의 생물학자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은 생물학(biology) 대신 생태학(ecology)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헤켈에 따르면 자연계에 존재하는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생명체와 비생명체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균형, 조화, 조절, 정화 능력을 갖춘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 생명체, 비생명체의 세계 곧 생태계의 구성원들은 상호 유기적 관계 속에서 상호 작용하고 서로 의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유기적 관계의 훼손은 생태계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태학은 중립적인 과학, 곧 실천과 행동이 없는 순수한 학문입니다. 생태학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당시 자연생태계의 훼손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이에 생태주의(ecologism)가 등장합니다. 생태주의는 사람들의 입장이나 태도를 결정하며 실천과 행동을 전제한 원칙이자 사상(idea)입니다.
지구 생태계에 심각한 위기가 발생했습니다. 특히 기후 변화, 생태계 훼손, 생물 다양성 감소는 회복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과학과 지식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자본주의,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현대 이념은 이러한 상황을 주도하거나 방치했습니다. 생태주의는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통제해 온 현대 사상과 이념에 대한 깊은 회의에서 출발했습니다.
생태주의자들은 생태위기의 본질을 ‘인간중심주의’로 규정하며 현대적인 과학, 철학, 경제, 사상, 이념은 모두 인간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처한 생태위기 해결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생태주의자들은 1960년대 미국 중산층이 주도했던 인간중심적인 환경주의 운동을 ‘표층생태주의(Shallow Ecology)’라고 부르며 이러한 운동의 대안으로 ‘심층생태주의(Deep Ecology)’를 제안합니다. 사실 심층생태주의란 오랫동안 서구 사회를 움직인 선과 악, 정신과 물질, 인간과 자연의 경계를 허무는 급진적인 것입니다. 아래 그림은 얕은(shallow) 생태주의, 깊은(deep) 생태주의의 본질적 차이를 표현한 것입니다.
생태위기에 대한 이 둘의 문제의식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를 보는 입장(position),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attitude)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1)자연착취를 전제하는 대량생산>(2)비자연적인 욕망에 의한 대량소비>(3)자연정화 불가능의 대량폐기”라는 현대적 악순환의 구조에 대한 해결 방식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위 그림처럼 자연과 인간의 관계설정이 인간중심인가 생태중심인가에 따라 둘의 결과가 큰 차이를 보이는 것입니다.
철학자 아르네 네스(Arne Naess)는 이 둘의 차이를 말했습니다. 1912년에 태어난 아르네 네스는 27살에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의 최연소 철학교수가 됩니다. 41살이 되던 해, 그는 레이첼 카슨의 저서 『침묵의 봄』을 처음 접합니다. 그리고 그는 교수직을 던지고 환경운동에 투신합니다. 아르네 네스는 행동하는 환경운동가로 변신했습니다. 1970년에는 댐 건설을 저지하기 위해 주민들과 함께 암벽에 몸을 묶을 정도로 현장활동가로 투신하기도 했습니다.
1973년, 아르네 네스는 인간중심의 환경주의 운동을 ‘표층생태주의(Shallow Ecology)’라고 규정했습니다. 위 그림처럼 인간을 다른 생명체보다 우선하는 표층생태주의 한계를 지적하며 “인간중심의 표층생태주의로는 인간의 환경파괴를 결코 저지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심층생태주의(Deep Ecology)’를 제시했습니다. 이후 아르네 네스와 동료 철학자들은 아래와 같은 ‘심층생태론 8대 강령’을 제안합니다.
(1)지구 상의 인간과 인간을 제외한 생명의 안녕과 번영은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진다. 이 가치들은 자연계가 인간의 목적을 위해 얼마나 유용한가 하는 문제와는 독립해 있다.
(2)생명체의 풍부함과 다양성은 이러한 가치의 실현에 이바지하며 또한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진다.
(3)인간들은 생명유지에 필요한 것들을 만족하게 하기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러한 풍부함과 다양성을 감소시킬 권리가 없다.
(4)인간의 생명과 문화의 반영은 실질적으로 더 적은 인구와 양립한다. 인간을 제외한 생명의 번영은 더 적은 인구를 요구한다.
(5)현재 인간의 자연계에 대한 간섭은 과도하며, 그 상황은 빠르게 악화되고 있다.
(6)따라서 정책이 변해야 한다. 이러한 정책들은 근본적인 경제적, 기술적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구조들에 영향을 미친다. 그 결과 발생할 상태는 현재와는 매우 달라질 것이다.
(7)이데올로기의 변화는 더 높은 생활수준에 집착하기보다는 주로 생활의 질(내재적 가치)에 대한 평가와 관련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큰 것(Bigness)과 위대한 것(Greatness)의 차이를 심오하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
(8)이상의 강령에 동의하는 사람은 직간접적으로 필요한 변화를 실행하고자 하는 의무를 지닌다.
이들에 따르면 환경주의와 생태주의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관입니다. 생태주의는 환경문제뿐 아니라 이러한 환경문제를 야기한 현대 산업사회와 자본주의에 대한 재검토와 수정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사회경제 구조에 대한 재검토와 수정 없는 생태의 지속가능성은 없다”라는 입장입니다. 이러한 입장 때문에 생태주의 실천에는 반산업적이며 비경제적 측면이 존재합니다. 마치 지속가능 커피라는 개념과 행동에 생태적 지속가능성은 물론 경제적, 사회적 지속가능성이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이러한 반산업적이며 비경제적인 태도, 곧 심층생태주의적 입장은 1995년, 카운터컬처, 인텔리젠시아, 스텀프타운이 시도했던 직거래(direct trade)와 같은 맥락입니다. 이들의 직거래에는 일반경제학의 “보이지 않는 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직거래는 수요와 공급이라는 시장의 메커니즘을 무시합니다. 형성된 시장가격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커피가격을 지불하는 ‘직거래’는 반경제적이며 비자본주의적 행위가 분명합니다. 이러한 직거래로 조달된 커피를 그들은 싱글오리진 커피, 지속가능 커피라고 불렀습니다. 소비자들은 이러한 그들의 행위에 열광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생산자와 소비자, 중심과 주변이 함께 진화하는 건강한 생태계의 공진화(coevolution)의 계기가 되어 주었습니다.
지속가능 커피를 위한 청년들의 직거래는 이를 전후로 특정시대, 제2물결과 제3물결을 구분 짓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속가능 커피를 위한 직거래의 등장 이후, 커피역사가들은 이 새로운 시대를 ‘제3물결’의 시대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의식과 행동은 곧바로 트렌드가 됩니다. 지속가능 커피, 제3물결 커피는 새로운 밀레니엄 초반을 관통하는 글로벌 메가 트렌드가 되었으며 현재도 진행 중입니다.
디자인은 커피만큼 만국의 공통언어입니다. 세계 어디에서든 커피가 커피인 것처럼 디자인은 디자인입니다. 인류가 하루 30억 잔의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디자인은 인류의 일상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산속에 살지 않는 한 하루 종일 디자인된 것들, 건축디자인, 산업디자인, 그래픽디자인, 패션디자인, 영상디자인을 마주하며 잠들기 직전까지 이들에 에워싸여 있습니다.
인간의 삶은 디자인, 스타일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반면 디자인은 삶을 주시하며 주시의 결과, 곧 트렌드, 시대정신이라고 부르는 특정 경향을 디자인에 반영합니다. 디자인은 예술처럼 인간을 앞서는 전위(avant-garde)가 아닙니다. 인간의 의식을 뒤따르는 후위(arrière-garde)입니다. 인간의 의식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특정한 디자인 ‘스타일’이 만들어지며 확산되며 유행하게 됩니다.
1990년대, 지속가능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이는 인간의 의식, 트렌드, 시대정신의 상당부분이 ‘지속가능’이라는 세계관으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지속가능 커피’라는 용어가 공식화될 당시, ‘지속가능 디자인’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며 새로운 카페 스타일, 분위기와 느낌을 만들어 내기 시작합니다. 아래 사진들은 이러한 의식이 반영된 카페 모습입니다.
지속가능 디자인은 인간의 의식 속에 있는 “자연, 환경, 생태”에 주목했습니다. 또한 지속가능을 위한 세 개의 원칙, 환경, 경제, 사회를 디자인에 투사시켜 디자인의 사회경제적 역할을 강조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지속가능 디자인의 정의는 다음처럼 요약됩니다.
(1)환경적 측면: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며 자연과 공생하는 디자인.
(2)경제적 측면: 물질과 에너지의 재활용, 순환경제를 추구하는 디자인.
(3)사회적 측면: 사회적 연대와 인간 모두를 위한 디자인.
주지하듯이 지속가능이라는 용어의 뿌리는, 1987년 발표된 UN브룬트란트 위원회(Brundtland Commission)의 보고서 『우리 공동의 미래Our Common Future』입니다. 이 보고서에서 지속가능이란 “현재의 필요를 충족하면서도 미래 세대가 그들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능력을 저해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지속가능이란 현재와 미래의 끊기지 않는 연속성을 강조한 것으로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자원이 미래 세대에게도 남아 있도록 하자는 의지를 반영한 것입니다. 이에 반응하는 지속가능 디자인을 위한 강령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디자인진흥원(KIDP)의 보고서 『친환경·지속가능』에 따르면 지속가능 디자인을 위한 세부 지침은 다음 5가지 원칙으로 강조됩니다.
지속가능 디자인, 지속가능 커피의 동력은 생태주의입니다. 생태주의는 커피를 위한 공간, 곧 카페 인테리어 디자인에 다양한 형태로 반영되기 시작합니다. 친환경디자인, 에코디자인, 그린디자인처럼 다양한 디자인 용어가 등장하는데 이 모든 용어를 관통하는 하나의 사상(idea)은 생태주의이며 이렇게 디자인된 지속가능 커피공간이 생태주의 카페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지속가능 디자인의 실천에는 5가지 원칙, #절약(Reduce), #재사용(Reuse), #재활용(Recycle), #재생(Regeneration), #재충전(Refill)이 있습니다. 이 원칙은 “자연착취를 전제하는 대량생산>비자연적인 욕망에 의한 대량소비>자연정화 불가능의 대량폐기”의 연결고리들을 끊어 내는 핵심 원칙이자 전략입니다. 지속가능 커피공간, 생태주의 카페 디자인에도 이러한 원칙이 다양한 형태로 적용됩니다.
생태주의 카페의 다양한 느낌이란 그곳을 책임지는 주체, 대부분 독립카페 운영자들의 사상(idea)이 반영된 것입니다. 이러한 카페의 느낌은 그곳을 찾는 특정 소비자들과의 공유를 위한 것입니다. 1990대부터 현재까지 생태주의 카페, 지속가능 커피를 위한 카페는 ‘힙핫플레이스(hip hot place)’로 수용되고 있습니다. 다양한 형식과 내용을 반영하는 생태주의 카페가 만들어지는데 이렇게 다양한 카페는 두 개의 생태주의, #표층생태주의와 #심층생태주의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1700년대 철학자 루소, 1800년대 낭만주의 예술, 1900년대 반문화 운동의 핵심경구입니다. 이들은 산업화된 속세, 환경 파괴의 현실공간을 떠나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이들에게 인간과 자연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유기체입니다. 자연은 살아있는 모든 생명의 어머니입니다. 인간은 결코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자연을 그리워하며 언제나 자연에 귀의하려 하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자연은 이 세계의 어떤 것보다 더욱 지혜로우며, 아름답고, 위대합니다. 대자연(Mother Nature)이란 만물의 어머니인 위대한 자연을 뜻합니다. 이러한 입장, 태도를 낭만적 생태주의(Ecological Romanticism)라고 말합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경구에서 ‘자연’이란 현실세계를 부정하는 도피처와 같은 곳입니다. 자연으로 도피할 뿐 특별한 대안은 없습니다. 주지하듯이 현대(modern)의 기계론적 정치경제는 자연착취를 당연시했습니다. 낭만주의자들은 이러한 정치경제에 반발했습니다. 착취당하는 현실세계의 자연은 부정의 대상일 뿐입니다. 이들은 인간의 손이 닫지 않은 과거의 자연을 상상했습니다. 순수했던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했습니다.
얕든(shallow) 깊든(deep) 생태주의자들은 계몽철학, 인간중심주의를 자연파괴의 원인으로 간주합니다. 얕은 생태주의자들은 현실을 부정하며 “자연으로 돌아가라!” 과거로 돌아가라고 주문하는데 반면 깊은 생태주의자들은 미래의 자연을 생각했습니다. 미래에서의 자연과 인간의 조화, 균형, 다른 종들과의 공생을 구체적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주지하듯이 ‘생태주의’란 생태학에 근거한 존재들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이러한 인식에는 합리적 관점에서 자연을 이해하려는 의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생태주의 자연관이란 표층생태주와 같은 낭만적 자연관의 초월적이고 신비화된 상상 속 자연과는 본질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래 이미지들은 자연을 그리워하면서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현대인들의 의식, 무의식이 반영된 커피공간입니다.
합리적 생태주의(ecological rationalism), 사회적 생태주의(social ecology)는 낭만적 생태주의와 마찬가지로 동시대 자연재해와 생태계 교란을 데카르트와 연동된 계몽주의 자연관에서 시작된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문제해결 방식은 모두 다릅니다. 합리적 생태주의자들은 계몽주의로 구축된 동시대 사회문화, 정치경제는 완벽하게 재검토, 수정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주지하듯이 계몽이란 “어둠을 밝히는 빛”을 말하는데 여기서 어둠이란 인간의 무지, 어리석음, 미성숙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어둠을 밝혀 주는 ‘빛’은 신(神)이 아닌 인간의 합리성(合理性)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합리성은 자연생태계의 파괴를 주도했거나 방치했습니다.
합리적 생태주의자들은 문제해결을 위해 인간의 합리성을 다시 소환합니다. 이들은 생태환경 파괴를 유발한 ‘합리주의’를 비합리적인 것으로 비판합니다. 대신 지속가능한 생태환경을 위해서는 ‘생태적 합리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생태합리주의는 생태계의 복잡한 유기적 인과성을 이해하고, 자연의 도구적 가치는 물론 비도구적 가치도 고려하며, 미래세대뿐만 아니라 다른 생물종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합리적 생태주의는 디자인, 곧 지속가능 디자인의 행동적 지침이 됩니다. 지속가능 디자인의 5가지 강령, #절약(Reduce), #재사용(Reuse), #재활용(Recycle), #재생(Regeneration), #재충전(Refill)이 반영된 생태주의 카페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회적 생태주의자들은 합리적 생태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원인과 해결 방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사회적 생태주의자들은 생태환경 위기의 본질이란 자본주의 구조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멈출 수 없는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의 메커니즘은 자본주의의 욕망과 연동된 것으로 이 악순환을 멈추지 못하면 인류 미래는 없을 것이라고 단정합니다. 사회적 생태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비자본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생태주의와 연결된 디자이너들은 사회적 생태주의에 더 큰 호감을 갖게 됩니다. 리사이클 디자인(Recycle design) 대신 업사이클 디자인(Upcycle design)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냅니다. 이들은 업사이클이라는 행동을 통해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의 메커니즘을 균열시킵니다. 업사이클을 통한 ‘탈성장(degrowth)’에 기여하기도 합니다.
지속가능 커피, 지속가능 디자인, 생태주의 카페의 공통분모는 얕든 깊든 그 정도와 관계없이 생태주의입니다. 생태주의는 “자연과 인간의 새로운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려는 사상(idea)입니다. 이러한 관계들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위 도표처럼 1950년대 이후 포스트모던 문화는 ‘생태주의’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문화는 한 사회의 주요한 행동 양식이나 상징 체계를 말합니다. 같은 차원에서 동시대 커피문화, 예를 들어 동시대 커피의 물결(wave)은 생태주의와 섬세하게 연동되어 있습니다. 생태주의를 이해하면 동시대 커피문화를 알 수 있고 미래 커피문화의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상당 기간 생태주의는 인류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가이드 라인으로 작동할 것입니다. ☕■
#근대, 현대역사 #현대성(Modernity) #세속화 #개인주의 #도시, 도시화 #시기, 질투, 경쟁 #소외
HISTORY OF IDEAS: Modernity
*The School of Life, *2020, *11분, *영어(한국어 자동자막 설정 필요)
https://www.youtube.com/watch?v=HIdflecvQG8&t=168s
#근대, 현대역사 #소비주의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페기
HISTORY OF IDEAS: Consumerism
*The School of Life, *2017, *11분, *영어(한국어 자동자막 설정 필요)
https://www.youtube.com/watch?v=Y-Unq3R--M0&t=361s
#생태경제학 #일반경제학 #생태학 + 경제학
Ecology in economics, counting nature in
*영상제작: UN Environment Programme, UNEP *2023, *3분, *영어(한국어 자동자막 설정 필요)
https://www.youtube.com/watch?v=lMr8-FZeWnA
#성장과 탈성장 #현대경제의 문제들 #환경파괴 #지속가능성
Degrowth: Is it time to live better with less?
*영상제작: CNBC International, *2022, *7분, *영어(한국어 자동자막 설정 필요)
https://www.youtube.com/watch?v=Ia8u5P0KbP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