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박고 그냥 가다니' 글 관련 : https://brunch.co.kr/@freeblue/53)
경찰관이 말했다. "보험사에서 문자 갔을 거예요. 그걸로 차량수리 하시면 되세요."
카톡소리도 듣기 싫어 알람을 아예 무음으로 해놓은 상태였다. 카톡을 열어보니 보험사에서 도착한 메시지가 있었다. 사고 낸 사람과 사고당한 사람의 차량 번호도 적혀있었다.
'XXX 5115'
'응?'
XXX표시는 왜 저기에 해놓은 건지 의아했다. 개인정보를 감추려는 것인지 알려주려는 것인지 혼동됐다.
사고 일시는 새벽 1시였다. 아마도 같은 동 아파트에 사는 사람 같은데 이 사실을 알면 서로 뻘쭘해질 것 같았다. 접수번호로 수리하시면 된다는 경찰관의 말에 고민하다가 한마디 내뱉었다.
"그 차에 벌점이랑 벌금 다 물리고 싶어요."
몇 주간 아픈 사람을 신경 쓰게 하고 귀찮게 한 합법적인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었다.
그 조치는 절차상 원래 하게 되어 있어 이미 처리했다고 경찰관이 답했다.
"사고 낸 차주가 젊은 사람인 것 같은데 초보여서 잘 몰라서 그랬다며 피해차주(나)에게 사과하고 싶다고 하는데 연락처 알려드려도 될까요?" 경찰관이 물었다.
"예?!?!?! 사과를 하려면 진작 포스트잇이라도 붙여놓았어야지 이제 와서 무슨 사과요? 그리고 초보는 무슨. 초보가 새벽 1시에 주차를 해요? 초보가 아니라 음주 운전이었겠지."라는 나의 중얼거림에 경찰관은 웃으며 내 연락처를 물피도주범에게 알려주지 않길 원하냐고 물었다. 귀찮다. 물피도주범과 대화하는 것도 싫었고 연락처를 알려주는 건 더더욱 싫었다. 범인이 멀쩡한 정신이었다면 사고당한 후 며칠간 그 자리에 주차 중인 내 차 상태를 알고도 남았을 것이다. 물피도주범도 내 차량번호를 카톡에서 봤을 테니 주차장을 둘러보았다면 충분히 내 차와 연락처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병원진료를 위해 나가는 것 외엔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았다. 며칠 후 아파트 지상 주차장을 지나 현관으로 들어서려는데 내 차를 긁은 초보(?) 운전자의 5115(실제 번호 아님) 차량을 발견했다. 내 차를 흰색으로 긁어버린 차의 색깔은 놀랍게도 검은색이었다.
'아, 진짜로 흰색으로 긁혔다고 흰색차가 긁은 게 아니구나!'라는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되었다.
그 사이 뭐라도 칠했는지 모르겠지만 내 차 상처에 비하면 그의 차는 살짝 긁힌 흔적이 있을 뿐 멀쩡했다.
트렁크에 거침없이 짐을 싣고 있는 5115 차주의 행동을 보고 있자니 아무리 봐도 '초보' 느낌이 나지 않았다. 카레이서라고 해도 믿을 만큼 '겁나' 운전 잘할 것 같은, 운동으로 다져진 건장한 체격의 30~40대 남자였다. 차량 앞유리에 붙여놓은 스티커로 우리 집 위위층에 사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다.
몸이 아프니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었다. 그 남자에게 한마디 쏘아붙이려다가 같은 건물에 내 아이도 함께 살고 있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운전자가 저 남자가 아닐 수도 있으므로... 우울증에 걸리니 겁도 없고 눈에 뵈는 것도 없어졌지만 혹시 아이에게 피해라도 갈까 봐 쏘아붙이지 못했다. 그 후 가끔 본 5115 검은색 차량은 그 남자 외엔 운전하는 사람이 없었다.
지나가다 그 남성과 차량을 보면 괜히 째려보았다. 왜 째려보냐고 물어보면 "내 차 긁고 도망간 사람이 초보라길래 진짜인가 궁금해서 보는 중이라고." 대답하려 했으나 그는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누구인지 그도 알려면 알 수 있었지만 모르는 건지, 모른척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가해자는 본인이 한 나쁜 행동을 굳이 기억하려고 하지 않으니...
휴대폰을 보다가 경찰관에게 보낸 사진을 다시 보게 되었다. 사고 날 당시 내 차가 주차된 위치를 동그랗게 표시해 둔 사진을 보다가 손가락으로 화면을 벌렸다. 동시에 내 눈도 벌어졌다. 동그라마 친 사고 위치에 내 차를 긁고 도망간 물피도주범의 차가 찍혀 있었다. 얼떨결에 내가 범인차량을 정확히 찍어서 경찰관에게 건네었다는 것을 알고 어이가 없었다.
'처음부터 나는 범인을 알고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