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지상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블랙박스를 껐다.
당분간 차를 끌고 직장에 나갈 일이 없으므로 블랙박스에게도 휴식의 시간을 주었다. 하루 온종일 반짝거리던 블랙박스는 주인과 함께 빛을 잃었다.
아이가 정기적으로 치료 중인 병원에 가야 하는 날이 되었다.
'차가 방전이 되진 않았겠지? 운전해도 되겠지? 졸음이 쏟아지진 않겠지? 사고 안 나게 집중해서 조심히 다녀오자.'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몇 주만에 자동차 시동을 켠 후 병원에서 아이의 약을 받아 무사히 귀환했다.
내가 입원했던 대학병원과 같은 병원 소아과에 다니는 아이의 진료를 볼 때는 차를 타고 다녀왔지만, 내 진료를 보러 갈 때는 일부러 힘을 내 걸어서 다녀왔다. 그때만이라도 억지로 움직여 보자는 뜻도 있었고 운전을 하면 죽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눈물이 줄줄 흘렀기 때문에 위험했다. 제일 편하게 울 수 있는 곳은, 집이 아니라 도로 소음으로 인해 차 안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는 차 안이 유일했다.
주차장에 있는 내 차를 보고 지나치는데 차체 오른편 앞바퀴부터 뒷바퀴까지 긁혀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이 병원을 다녀와서 하루 사이에 누가 긁고 갔나 보다 생각하고 관리소에 갔다. 하필이면 꼭 이럴 때 블랙박스가 꺼져있다. 전날 아이 진료 후 아파트로 차가 들어올 때 이미 차는 긁혀있었음을 관리소 CCTV를 통해 알게 되었다.
전날 어디 다녀오셨냐는 관리소 직원의 물음에 병원을 다녀왔다고 답하다가 아차 싶었다.
'병원에서 긁혔을 수도 있겠구나!'
병원에 전화를 해서 내 차에 상처를 입힌 물피도주범을 잡을 생각만으로도 짜증과 귀찮음이 잔뜩 몰려왔다.
병원 지하주차장을 머릿속으로 더듬어보다가 차체 오른편이 긁힐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차 오른편에는 기둥이 있었기에 내 오른쪽에는 다른 차가 주차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병원은 물피도주 사고의 현장이 될 수 없었다.
병원에서 긁힌 게 아니므로 CCTV를 이전으로 돌려, 병원으로 출발하는 내 차가 아파트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장면을 보았다. 희미하지만 이미 긁힌 자국이 보였다. 나는 확신했지만(병원 가기 전에 이미 차가 긁혀있었다!) 관리소 직원은 (귀찮았는지) 내 차가 아파트 주차장을 빠져나갈 때 긁힌 자국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병원에서 긁힌 거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당분간 나가지 않을 직장에서 돌아와 블랙박스를 끈 그날, 퇴근 후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내 차에는 흠집이 보이지 않았다.(흠집이 있었다면 직장에 다니는 동안 긁힌 것이다.)
직장에서 긁힌 거라면 물피도주범 찾기를 포기하려고 했다. 차를 긁어놓고 도망간 사람이 직장동료인지 민원인인지 CCTV를 확인해야 하는 상황은 질병휴직 중이라 뭔가 이상했다. 뭐가 이상한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이상했다.
직장에서 마지막으로 운전해 돌아온 그날 차에 흠집이 없었고 병원에서 긁힌 건 아닌 게 확실하니 몇 주간 주차되어 있던 아파트 주차장에서 사고를 당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이 밥도 기껏 배달음식으로 때우고 있는 상황에, 우울증 환자에게 추리를 하게 만드는 물피도주범을 반드시 잡고야 말겠다!'라고 다짐을 하고 싶었으나 무기력했다.
애초에 차를 긁을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제일 좋았을 텐데... 실수로 긁었더라도 도망가지 않았다면 범인 찾기 놀이라도 안 해도 됐을 텐데... 그랬다면 범인을 잡을 수고도, 차를 수리해야 하는 귀찮음도, 차를 렌트해야 하는 불편함도, 원상복구가 잘 되었는지 신경 쓸 필요도 없었을 텐데...
애초에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다면 휴직을 할 필요도, 아이에게 매일 배달음식을 시켜줄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없었던 것처럼 원상복구 하는 것은 노력과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힘든 일이다.
긁힌 자국은 흰색이었다. 3주간 내 차 오른쪽에 주차한 흰색 차가 7대 정도 있었으나 모두 용의 선상에서 벗어났다. 내가 주차를 한 날부터 3주간의 CCTV를 보려면 꽤 시간이 걸린다고 관리소 직원이 말씀하셨다. 귀찮아서 보기 싫어서 그렇게 말하는구나 싶었으나 정말로 CCTV 하루 분량을 몇 배속을 해서 보는 데만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고서는 관리소 직원에게 숙제를 던져준 거 같아 미안했다. 맘 같아선 할 일 없는 내가 CCTV를 대신 확인해주고 싶었으나 개인정보보호법(?)인가 때문에 내가 볼 수는 없다고 하셨다.
관리소 직원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부탁한다는 의미로 음료수 몇 개와 갓 오픈한 유부초밥가게에서 유부초밥을 사들고 갔다.
차가 긁힌 자국이 흰색이라고 해서 반드시 흰색차가 긁고 간 건 아니라는 글을 어디선가 얼핏 보고 더 골치 아파졌다.
며칠이 지나도 관리소에선 소식이 없었다. 차가 긁힌 것보다 더 짜증 나는 건 기력 없는 내가 이 사건을 해결할 심신의 여유가 없어 너무 귀찮다는 것이었다.
'망할, 차를 이 정도 긁었으면 모를 수 없을 텐데 도망가다니!'
운전을 하는 사람은 알 것이다. 차체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생각보다 크기 때문에 차를 박으면 운전자가 모르기 힘들다는 걸... 며칠 후에 관리소에 전화하니 범인을 찾을 수가 없다며 경찰에 신고를 해보라고 하셨다. 본인들은 권한이 없다나 뭐라나?!?!?!
그럼, 진작 처음부터 그렇게 말할 것이지 왜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따지기도 귀찮았고 새로 생긴 가게에서 산 유부초밥이 아까울 따름이었다.
관할 경찰서에 가서 물피도주 당했음을 신고했다. 사고 위치를 그리고 차체 긁힌 부위 사진과 정확한 사고 위치를 찍은 사진을 경찰관에게 보냈다. 당시 주차해 놓은 내 차의 사고 위치를 찍을 때 다른 차가 주차 중이어서 그 차 자리에 내 차가 있었음을 동그라미로 표시해서 보냈다. 다행히 경찰관은 친절했다. 더 이상 에너지 쓰기가 싫어 별 기대도 하지 않고 집에서 칩거했다. 이삼일 후에 경찰관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렇게 빨리 연락이? 결국 못 찾았나 보다...'
'못 찾겠다 꾀꼬리꾀꼬리꾀꼬리'라고 할 줄 알았는데 경찰관은 범인을 찾았다는 의외의(?) 말을 했다. 어떻게 찾으셨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좀 빨리 찾았단다. 주차된 첫날부터 훑어보던 관리소 직원과 반대로 경찰관은 역으로 CCTV화면을 보셨는지 빨리 찾을 수 있었다.
내 차는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기 이틀전날쯤 긁혔다는 걸 알았다. 처음부터 3주 분량의 CCTV를 훑어봤다면 정말 환장할 노릇의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CCTV화면은 32배속(너무 빨라 차량 출입을 보기 힘듦)으로 보아도 하루치 보는데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는 걸 직접 확인한 후라 경찰관에게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경찰서 홈페이지에 그 경찰관을 칭찬하는 글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귀찮아서 하진 못했다.
우울증을 심하게 앓으니 감정이 더 농밀해져 고마운 마음이 한층 더 깊게 느껴졌다. 평소라면 경찰관이 해 준 일을 당연시 여기고 예의상 감사의 말을 전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경찰관의 일을 당연히 여기지 않고 진심으로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일이라고 해서 당연하게 여기면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고마운 감정이 이렇게 진실되게 느껴지다니!
'내가 정말 많이 아프긴 아프구나.'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