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다엔 30년 만에 눈
이젠 염색해도 실버에 가까운 금발, 나 또한 마찬가지 염색으로 겨우 갈색을 유지
그녀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태어나서 한국전, 베트남전쟁 등을 겪었고, 나는 전쟁의 아픔을 책이나 TV로만 아는 세대
그녀와 나는 백 퍼센트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지금 그녀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는 태평양을 건너 끝없는 콩밭과 옥수수밭을 지나야 만이 가능
그해 겨울 미국 전역은 살인적인 추위와 폭설이 연일 계속되었으며, 블루밍턴(인디애나 주)도 거의 매일 눈이 내렸고 심지어 4월에도 눈이 왔었다.
블루밍턴에 가기 전, 인터넷에서 찾아낸 도시의 특성은 “매우 안전한 도시”와 “예측 불가능한 날씨”였는데 살아보니 두 가지 다 정확하게 맞았다.
어떻게든 생존 영어라도 해야 돼서 인터넷 뉴스를 틀어놓으면 하루 종일 “플로리다엔 30년 만에 눈”, “미 체조선수팀의 팀 닥터 미투 사건”과 “트럼프 대통령(당시)”이 실시간으로 나왔었다.
십여 년 전이긴 하나 2년 간의 미국 생활 경험으로 쉽게 정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폭설로 인해 학교는 폐쇄되었고 지나가는 사람을 마주치기도 어려웠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미국인들은 비가 오나 눈이 와도 우산을 잘 쓰지 않는다. 어쩌면 어려서부터 걷는 것보다는 차를 타고 다녀서인지 미국에 오면 갑자기 우산은 무용지물이 된다.
눈을 온몸으로 맞으며 식료품을 사러 가거나 쓰레기 버리러 나가면서 문득문득 나는 왜 이러고 여기에 있나 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어느 날, 블루밍턴 시 도서관에 가면 무료로 영어를 배울 수 있다고 해서 반가운 마음에 찾아갔다. 이 수업, 저 수업 기웃거리다가 미국인 할머니 선생님 수업이 있는데 질문은 잘하지 않으며 재미있다는 소문에 참석했었다.
미국 사람들은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고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서 처음 만나면 개인적인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선입견일 수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것처럼 사람에 따라 다를 뿐이지 기본적으로는 타인에게 관심이 많다. 다만, 관심을 표명하는 방법이 차이가 있거나 직접적으로 먼저 묻지 않는 문화에 길들여져 있을 수 있다.
다른 미국인 친구 이야기로는 갑자기 이웃에 사는 부부가 신문 광고에 집을 내놓으면 혹시 결혼생활에 문제가 있나라고 짐작하기도 하며,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소문도 듣는다고 한다. 사람 사는 세상 다 똑같은 것이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메리는 그날 새로 온 학생인 나에게 폭풍 질문을 쏟아냈다. “언제 왔냐, 어디서 왔냐, 한국에서 직업이 어떻게 되냐, 인디애나 대학에서는 무슨 일을 하냐 등등등”
영어가 안되니 돌려서 말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영어로 대답 자체가 어려운데 어떻게 에둘러서 또는 순간 말을 지어서 할 수 있단 말인가. 내 능력으로는 부족해서 사실 그대로 말해 주었다.
집에 와서 페이스북을 열었더니 그녀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메리) “미니어처 박물관에 가지 않을래?”
(나) “가고 싶긴 하다.”
(메리) ”다른 학생들은 못 간다고 하니 둘이 가자. “
(나) (갑자기 암담) ”내일 무슨 일이 있었는데 깜박했다. 못 가겠다. 쏘리“
(메리) ”다른 날 가면 된다. 같이 가자 “
(나) (이렇게 들이대면........) ”yes “
보통의 미국인들은 주택에 거주하는 것을 선호하며, 대도시가 아닌 이런 소규모 도시의 아파트에서는 주로 학생들, 이민자,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거주한다. 당시에 내가 살았던 아파트는 히터를 틀어놔도 얇은 벽과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찬바람으로 추워 죽을 지경이었다.
낯선 미국인과 영어로 대화해야 한다는 큰 부담감이 있었으나, 추운 집에 하루 종일 있기도 지겨워졌고 그녀의 강한 밀어붙임에 결정장애가 주 특기인 나는 ”Miniature Museum “이 무엇인지 또는 어디인지도 모르고 따라나서면서 메리와 나의 예상치 못한 긴 동행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