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출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으려니, 치앙라이에 있는 붐에게서 전화가 왔다. 공항에 잘 도착했는지, 엄마는 어떠신지를 묻는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엄마가 도착하고 난 이후에는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가 버려, 지난 이십여 일을 같이 보낸 친구에게 안부 전화 한번 걸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우리가 캘리포니아에서 룸메이트로 생활하다 십오 년 만에 방콕에서 다시 만났을 때,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입이 떨어지지 않아 말하지 못했던 엄마가 아프다는 것을 그녀에게 얘기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녀가 내 얘길 듣고 나서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위로를 해줬는지 생각이 나지 않으나, 그냥 홀가분했었다는 기억만이 남아있다.
다시 안 볼 사람들처럼 성대한 작별인사는 더 이상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붐, “태어나서 한 번도 눈을 제대로 본 적이 없어, 겨울에 눈 보러 가고 싶어”
나, “언제라도 와, 그런데 내가 말한 거 잊지 마, 진짜 추워, 밖에 나가고 싶은 생각이 다 사라져 버릴 거야”
붐, “555” (태국 사람들이 쓰는 ㅎㅎㅎ 또는 ㅋㅋㅋ)
나, “ㅋㅋㅋ”
그래도 보고 싶다면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에 다시 서울에 와.
공항에서 체크인을 하고, 짐을 부치고, 검색대를 통과하는 여러 가지 통과의례들은 언제나 익숙하지 않음으로 인해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긴장감이 엄마에게도 전달되었는지 심한 강박증을 일으켜 방금 다녀온 화장실을 항공사 앞에서, 검색대 대기 줄에서, 검색대를 통과해서 계속 가야겠다고 한다.
“방금 전에 다녀왔어요”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을 타인이 기억하면서 방금 전에 그 일을 했다고 하면 어떤 기분이 들까?
언제 봤는지 기억이 전혀 없을 정도로 안 본 지 오래된 손녀가 보고 싶다고 했더니 어제도 봤잖아 하면,
나는 정신이상자일까 아니면 모두가 나를 다 속이거나 무시하는 걸까?
치매에 판타지는 없다. 언론매체를 통해서 듣는 뉴스들은 다 끔찍한 이야기들 밖에 없다.
치매를 다루었던 드라마나 영화에 감동하긴 했지만, 인간에게 찾아온 치명적인 이 질병을 아름답게 담으려는 모습은 현실과는 괴리가 느껴진다.
판타지란 터무니없는 가상 세계에서 일이 벌어지거나,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예상을 깨며 빈번히 일어나는 사건을 담은 문학 작품으로 해리포터 시리즈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네이버 국어사전
치매를 앓고 있는 본인과 감당해야 할 가족들의 고통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이럴 때 “참담하다”라는 표현을 쓸 수 있나 보다.
사람이 아프면 누구나 주변으로부터 관심받게 되고 없던 애정도 생기게 된다면, 치매는 미움과 구박을 받게 된다. 원인도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아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어떤 것을 대비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지금 생각하면 치매 판정을 받은 직후에 엄마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서 외줄 타기를 하는 것처럼 흔들거린 것 같다. 감정이 고조되면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었고, 스스로 견디지를 못했었다.
우리 또한 갑자기 우산 없이 길을 가다가 소나기를 맞은 것처럼 그냥 젖을 수밖에 없었다.
보건소 치매센터, 건강보험관리공단, 국민연금관리공단 등을 찾아 도움을 구해보려 했지만, 세상일 쉬운 것 없다고 무엇 하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기저귀가 무료로 제공된다는 말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오래전 책 표지에 원작을 그대로 살린 책이라는 설명이 있어서 단순한 호기심에 하드커버로 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구매하긴 했으나,
다른 동화책과는 다르게 읽히지 않아 책장 한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우연히 지난겨울에 다시 보다가 어쩌면 앨리스가 토끼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만난 새로운 세계,
이상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보기엔 자기들은 정상인 반면에, 앨리스가 비정상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엄마가 떠올랐다.
우리가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고, 엄마는 정상인데 우리가 우리와 너무나 다르다고 생각해 그녀의 언행을 바로 잡아주려고 그녀를 매번 다그치고 가르치려 드는 건 아닐까?
어쩌면 그녀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다 비정상이지 않을까?
인천공항에 내리니 남자, 제부가 기다리고 있다. 더운 여름에서 추운 겨울로 왔으니 매우 추울 거라고 예상했지만, 새벽 공기는 생각보다는 춥지 않았다.
이른 새벽이어서인지 모든 것이 다 깜깜했다.
집에 돌아온 엄마는 죽은 듯이 이 삼 일간 잠만 잤다.
기침도 차츰 잦아들었으나, 태국에서 가끔 우연히 드러났던 얼굴의 미소나 생기는 다 사라지고 무심한 표정만 남아있어 보였다.
지금은 다시 주간 보호센터에 나가고 계신다.
우리는 지난 연말과 새해를 조금은 들떠서 한 달 살기 계획을 세우며,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예약을 하고 분주했었지만 돌아온 일상에서는 각자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기 바빠서 ‘그때 어땠지’라는 이야기도 거의 하지 않는다.
엄마의 상태는 좋아질 수 없고 조금씩이라도 나빠질 것이다. 너무 단언적인 표현이 거슬릴 수도 있지만, 지난 시간을 겪고 나서 얻은 결론이니 나 스스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많이들 이야기하는 치매 환자의 마지막을 엄마와 우리는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하거나 상상하기 힘들지만,
다행히도 평범하지 않은 일상으로 인해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는 일에 대한 걱정은 가볍게 지나칠 수 있다.
더 이상 엄마가 치매 환자인 것은 비밀이 아니다.
어린아이처럼 혼자 둘 수 없어 누군가에게는 부탁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 숨기기 어렵기도 하지만, 가족을 보살피면서 생기는 감정의 요동침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말해야 할 때, 털어놓고 싶을 때는 버티지 않고 엄마가 아프다고 이야기한다. 그러고 났더니, 나도 몰랐던 친구들의 이야기도 들려왔다.
지병으로 고생하다 돌아가신 엄마, 치매가 심해 요양원에 계신 엄마, 연로하셔서 걷지 못하시니 집안에만 계시는 부모님, 아픈 자식을 키우면서 내내 마음 아픈 친구.
안타까워하고 걱정해 주는 선배들, 왜 그때 우리한테 말하지 않았냐는 동료와 후배들.
가끔씩 만나면 부모님 흉으로 시작해서, 신세 한탄, 삶의 방식, 잘 늙어가는 방법, 나라 걱정, 결국 망한 주식 등 이 얘기, 저 얘기하다 밥 먹고 헤어진다.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이렇게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자문해 본다.
우리 삶이 늘 그래왔듯이 다시 예상할 수 없는 일,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불현듯 찾아오겠지만, 손을 내밀면 받아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그래도 잘~ 살아가지 않을까 싶다.
참고하세요.
마지막 회라고 했더니, 리샤가 읽어보고는 그려주고 갔어요. 마음 내키면 앞으로도 그리지 않을까 싶긴 합니다.
짧은 에필로그
미흡한 글을 읽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런 에필로그를 쓸 자격이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꼭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잠깐이라도 방문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내.손을 잡으면 하늘을 나는 정도, 낙하(with 아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