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다와 폴의 환대
문밖에서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에 나가보면, 린다와 폴이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그 옆에서 메리도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결혼 후, 다른 도시에 살고 있는 제시카(가명, 린다와 폴의 딸)의 방을 내어 주셔서 잠자리는 블루밍턴에 있는 싸구려 매트리스보다 훨씬 편안했다. 그 누구도 아침에 깨우지 않아 멋쩍은 웃음으로 이미 준비된 식탁에 앉아 홈메이드 아메리칸 브렉퍼스트를 즐겼다.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가구, 도도해 보이는 그릇장, 가족들의 사진, 손때 묻은 피아노와 책들로 인해 린다의 집(표지 참조)은 품위가 느껴졌으며, 안주인의 야무진 살림 솜씨로 거실, 주방, 화장실 등 집안 곳곳이 무척이나 정갈했다.
도착한 날이 일요일이었는지, 아침을 먹고 메리와 나는 린다와 폴이 다니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모두가 반갑게 맞아주셨고,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안부를 묻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온해졌다.
키가 무척이나 작은 린다가 말을 시작하면, 듬직한 체구의 키가 큰 폴이 린다를 향해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무언가 뭉클했다.
몸이 불편한 린다를 키다리 아저씨 같은 폴이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는 것 같았다. 보고 있으면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처럼 온기가 느껴졌다.
그것은 단지 린다의 장애가 불러일으킨 나의 경박스러운 동정심으로 인함은 아니었으며,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본 솔직한 심정이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보다는 차원이 다르게 느껴졌다. 깊은 사랑이라는 정의가 따로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이성을 향한 사랑에 더해 상대방에 대한 진정한 존중, 이해, 배려 그리고 헌신이 들어있는 사랑이었다.
어느 날 저녁, 린다는 가족 앨범을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과거 우리의 모습을 닮은 귀엽고 개구쟁이 모습이 가득한 아이들의 사진이 담겨있었다. 조금 앨범을 넘기니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자아이가 보였다.
제시카는 학교에서 우연히 단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김치를 먹어보고 맛있었다며 자기 자신에 대한 커다란 의문에 휩싸였다고 한다. 린다와 폴은 제시카의 친부모를 찾아 한국에도 왔었다고 했다.
미국에서 미국인 부모와 미국 음식을 먹고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조그마한 아이가 어떻게 갑자기 자기의 본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느낄 수 있었을까?
오빠인 남자아이는 청소년기에 불의의 사고에 연루되어 하늘나라로 떠난 지 오래되었다는 이야기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망연자실 길을 잃어버렸다.
린다와 폴의 눈을 마주하기 어려웠다.
린다는 딸아이가 얼마나 “스마트”한가에 대해서도 한참 이야기했다. 린다의 이야기를 듣는 폴의 아빠 미소에 나도 겨우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우리네 엄마와 아빠 같은 마음으로 린다와 폴은 그 아이들을 한없이 사랑하고, 키우는 내내 가슴 아파했을 것만 같은 모습이 역력했다.
여전히 린다는 때때로 밤잠을 설치며, 제시카가 자신의 가정에서 잘 살아가기만을 기도하고 있다는 메리의 이야기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말이 거의 없는 폴이 워싱턴에 온 적 있느냐고 물어본다. 왜 벌써 두 번이나 와버렸는지, 그냥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하며 폴의 기대에 부응해주고 싶었으나, 메리가 있어서 거짓말은 절대 할 수가 없었다. 그럼 워싱턴의 밤거리를 다녀 본 적 있느냐고 해서 결단코 없다고 했더니, 그럼 가보자고 해서 따라나섰다.
밤하늘의 포토맥 강(Potomac River)은 낮보다 더 아름다웠으며, 멀리서만 바라봤던 미국 의회의 의사당인”더 캐피톨(The Capitol)”은 아직도 누군가 일을 하고 있는지 불이 환하게 켜있었다. 여의도의 국회의사당을 언급하며 인상적이라고 했더니,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도로 한가운데에 차를 멈췄다.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DC주민이 "No Problem!"라는데 "Why Not!" 한 장 찍고 여기저기 밤거리를 달리다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은 워싱턴 DC에서 그동안 안 가본 곳을 가보기로 하고, 린다의 편안한 집에서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