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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 하면 학원과 수산시장을 떠올릴 것이다. 이곳을 거쳐 공무원이 된 사람들도 많을 것이고 재래식과 현대식 수산시장 간의 긴 갈등 끝에 지금의 어시장이 자리 잡고 있는 사실을 안다면 생선 마니아가 아닐까 한다. 9호선 노량진역과 노들역 사이에 아담한 녹지가 자리하고 있는데 바로 사육신 공원이다. 공부에 열중하느라 머리가 뜨거워진 수험생이나 젊은 연인,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산책 코스로 애용한다. 맞은편의 한강 조망도 뛰어나고 여의도 쪽 바지선에서 불꽃놀이 축제가 있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오늘은 사육신의 묘소를 돌아보며 570여 년 전의 역사를 돌아본다. 수양대군(세조)했는데 단종과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연상되지 않으면 국사선생님 등살에 학창 시절이 고달팠을 수도 있다. 필자는 '정난의 정자' 한자 표기가 政이 아니고 靖인 사실을 처음 알았다. 권력 다툼이 아닌 위난을 평정한 것으로 규정(이 씨 왕조를 넘보는 불순 세력 제거)하는 걸 보니 쿠데타라도 성공만 하면 정당화되는 건 동서고금을 통하여 일반적인 현상인 모양이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인다는 말은 진리다.
수양대군은 동생 안평대군과 김종서, 황보 인 등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 후 조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한다. 이에 반발하여, 선대인 세종, 문종 때부터 특별한 총애를 받던 집현전 학사 출신들과 일부 무관이 단종 복위 운동을 도모하다 거사 동지였던 김질과 그의 장인 정창손의 밀고로 실패로 돌아가고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이상 문관), 유응부(무관)등이 멸문지화를 당했으며 단종은 사사(賜死)되었다.
바로 이공원에 사육신 여섯 분과 당시 문인 김문기의 허묘를 포함 7기가 모셔져 있다. 생육신 중의 한 명이었던 김시습이 이들의 시신을 수습해서 이곳에 안장했다고 한다. 묘소에 가기 위해서는 불이문(不二門)을 거쳐 의절사(義節祠)에 다다르게 된다. 분향을 할 수 있으며 우측면에 조그만 문을 통과하면 묘소가 나타난다. 묘 앞에 비석이 있는데 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름 석자도 새기지 않았고 " *氏 지 묘"로 되어 있다.
집권세력 입장에선 그들이 대역 죄인이었겠지만 사후까지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처사는 아무리 정적관계라 할지라도 무도(無道) 한 경우가 아닌가 한다. 전투 중 숨을 거 둔 적장마저도 그가 보였던 됨됨이와 기개를 참작하여 비록 적이지만 후하게 장례를 치러 주기도 한다는데 유교를 숭상하는 나라로서 충을 다한 이들에게 이런 식의 사후처리는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유감이다.
그로부터 약 230년 후 숙종 때 사육신의 충렬을 재평가하게 되었고 다시 100년이 흐른 후 정조 때 신도비(神道碑)를 세우고 그들의 넋을 기렸다. 그리고 최근에 이르러서야 1978년 서울시에서 충의정신을 고양하고자 일대를 확장하여 정비하고 현재의 사육신 공원으로 단장했다.
숙종 이후 영조 정조는 왜 사육신을 재평가했을까? 왕들은 자신의 불안정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충성스러운 신하가 절실했는지 모르겠다. 권력자 입장에선 신하들이 세력을 형성하거나 한 눈 파는 게 두려울 것이다. 복종을 강요하는 데는 <일편단심>의 강조야 말로 신하들에 대해 가장 효과 있는 압박 수단이었을 것이다. 선비(사육신)의 충열을 기린다는 명분이었겠지만 권력자의 필요에 의한 통치 수단의 행위가 아니었을까?
게임에서 진다는 건 모든 걸 잃는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단종복위운동에 관련된 주요 인물들은 멸문지화를 면치 못했다. 남자는 젖먹이까지 전부 죽임을 당했고 부녀자들은 노비로 전락하여 공신(승자)들에게 배분(물건처럼)되었다. 물론 중세시대였긴 하지만 지금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만행으로 여겨진다. 하긴 지금의 정치를 봐도 대화나 타협 없이 극한의 대치를 하면서 한쪽을 완전히 척결하겠다는 전의를 불태우는 모습을 보면 그 당시는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공직자가 떠오르는 세력에 줄을 선다는 건 피할 수 없는 운명일까? 정인지, 한명회, 신숙주 등 수양대군에 베팅을 한 계유정난 공신들도 마찬가지였다. 거사가 실패했다면 사육신과 똑같은 화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권력이란 게 좋은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대세에 따른 경우도 있었겠으나 그 당시에는 대부분, 여차하면 자신은 물론 전가문의 몰살을 저당 잡히고 줄 서기를 한 것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눈치가 빨라야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핍박받는 독립운동 대신 친일이 재산과 가문 보전에 유리했다. 처음엔 머뭇거리던 많은 사람들이 중간에 전향했고 그 선택은 나쁘지 않았다. 변절이란 단어대신 시대를 읽을 줄 아는 유연성이란 말로 포장하면서 말이다. 필자는 나름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답을 찾기 위해 항상 생각해 오고 있지만 아직도 명쾌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가장 근사치의 답은 상황과 사람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요'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