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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 과수원 45

삶의 격랑 속에서 죽음을 그려보다

by 주단

- 삶의 격랑 속에서 죽음을 그려보다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아무 일도 중요치 않다. 생각들이 마구 흩어져 머릿속이 산만하다.

가야 할까. 가지 말아야 할까. 어느 쪽으로도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을 결정한다. 그리고 기다린다. 막연한 무엇인가가 내게 결정적인 종말을 가져오기를, 아니면 희망적인 변화라도 가져다 주기를.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는 환경에게, 나의 바람과 희망을 말살시키는 삶에게, 조금의 노력도 부여하고 싶지 않다. 노력의 가치를 찾을 수가 없다.

모든 것을 미워하고, 자신을 미워하고, 가장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자세로, 나의 모습을 파괴해 버리고 싶다.


모두가 싫다. 악에 차 있다. 시기와 질투와 욕심과 심술로 가득 차 있다.

막혀 있다. 내 주위의 6면이 검은 나무조각이다. 그 안에 나는 무생물로 누워 있다. 숨 쉬지 않고. 생각 없는 작은 생물들에 의해 먹히고 부패되어 가는 흉측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다.

행복하겠지. 욕심이 없고, 바람이 없기에 아픔도 있을 수 없겠지.


왜 자꾸 삶을 포기하고 싶어지는 건지 모르겠다. 산다는 자체가 너무 어렵고 고되다. 스스로 도태시키고 싶지도 않고 그럴만한 자신도 없는데, 생각은 수시로 그 테두리를 맴돌고 있다.


삶의 의미가 무얼까.

자신의 실현, 나라는 존재의 연출과 공연, 그 연극이 자신의 이상에서 빗나가고 있기에, 갑자기 모든 것을 내버리고 멀리 달아나고 싶기만 하다.


죽음이란 대체 무얼까.

왜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한 갈망이 이처럼 강하게 일어나는 걸까. 왜 삶에 대한 실망을 그에의 도피로써 해결하려고 하나.


원인과 이유와 해결책을 생각해 본다. 내가 삶에 불만한 이유를. 자신을 비롯한 모든 것이 불현듯 저주스럽고 미워지는 까닭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잘못은 나 자신과 나의 삶 자체에 놓여있고, 결국은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길로밖엔 해석될 수 없다.

나의 생각하는 방법이 그릇된 걸까. 항상 남을 탓하기 이전에 자신에게서 잘못을 인정하고, 그를 수정하려 노력하는 한편, 그 어려움을 인식하게 되고, 그에 회의하는 나의 사고방식이 틀린 걸까.

그렇다면 그 역시 자신을 도태시킬 또 다른 이유 중의 하나인 걸까.


내가 항상 자신을 긍정하기 위해 남을 탓해야 하고, 그로써만이 위로를 찾는다면, 그것은 삶에의 커다란 모순을 의미한다.

모두가 서로를 탓하고 서로를 부정하면, 그로써 서로가 받는 아픔은 더욱 클 것이기 때문이다.


나라는 인간에게는 지나치게 명석한 데가 있는가 하면, 지나치게 바보스러운 데가 있다. 계산과 이치를 따지는 일에 남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능숙하다고 자신하다가도, 그 정도가 지나치면 모든 것이 혼돈으로 화하여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때가 있다.


자신을 이처럼 회의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주위 환경? 삶에 대한 두려움? 가능성에의 추구?

가능성이란 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에 닿을 용기와 노력을 가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가치의 가능을 의미하는 거다.


문득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구겨지지 않고 때 묻지 않았던 마음, 삶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죽음을 하나의 불가능으로 믿었던 때, 그때의 내 모습으로 되돌리고 싶다.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접할 경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나는 죽는다는 사실을 이해조차 할 수가 없었다.

죽다니. 그럼 나의 이 맑은 정신은 어디로 간단 말인가.

죽어도 난 죽지 않을 거야. 죽지 않도록 계속 깨어 있을 수 있으니까.


그 어떤 연유에 의해 죽음을 배우게 되었는지 기억은 명료치 않다. 언제 처음으로 죽음을 가까이 느끼고 이를 그리게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아마도 책을 통해서가 아니었나 싶다. 주인공이 죽고 난 후의 아쉬움과 그 주변 인물들이 겪는 아픔을 읽으면서, 나도 내 주위사람들에게 강한 항의를 하고 싶을 때에, 떼쓰듯이 죽음을 바라보곤 했던 것 같다.

지금의 나 자신은 내 삶을 혐오하고 회의하는 횟수가 빈번해지고, 때론 죽음에 대한 강렬한 갈망을 느끼기도 한다.

변모해 버린 자신, 때 묻고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린 자신의 마음은, 진실을 회의하고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 몸담고 있는 사실들에조차 적응하기 어려워진다. 삶이란 것은 결국 이처럼 실망스러운 것이었나 하고.


자신은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 한 가지로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그보다 더 나은 것만 바라는 욕심쟁이이다.

사실은 내게 불만해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항상 불만해하는 모습은 지루하고 재미없고 못났다.


감사하는 마음자세는 어떨까. 항상 이보다 못한 것을 생각하고 그에 비한 자신에 감사하는 마음. 자신을 사랑하고 현실에 만족하고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는 모습. 지금보다 아름다울 것 같다.


죽음을 그리고 있는 순간에도, 살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나의 삶이 마냥 끝없이 지속되는 것도 아니고,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순간으로 제한되어 있다면, 그 순간에 어떤 가치를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짧은 순간에 존재하고 있는 자신이, 왜 그처럼 불만하고 비판으로 가득한 씁쓸한 모습이어야 할까.


삶이라는 것은, 주어졌기에 회의할 수 있는 거다.

죽음을 갈망하는 나의 모습도, 죽음을 눈앞에 둔 나의 모습도, 결국 삶이 있기에 가능한 모습이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삶을 갈망하는 그 어떤 사람과 비교해 본다면, 삶에 대한 회의는 삶에 겨운 풍족에의 비명이다.


결국은 자신이 사랑해야 할 대상은, 그 어떤 타인도 목적도 아니라, 나 스스로일 뿐이다.

나의 노력이 그 어떤 타인의 경외감을 목적으로 하거나, 과시를 위한 장식도구가 되어선 안된다.

자신을 스스로에게 떳떳하게 과시할 수 있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내가 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주어진 기회에, 주어진 삶에 감사하도록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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