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슈퍼스타
- 뮤지컬 슈퍼스타
친구의 사촌에게서 반강제로 사야 했던 뮤지컬 극장표는, 내게 가야만 한다는 의무감과 일요일을 편히 쉴 수 없으리란 부담감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늘 학교와 집을 오가는 쳇바퀴에서 잠시 벗어나는 희열도 있었다.
적당히 쾌청한 날씨에, 한적한 교외에 자리한 국립극장으로 가는 길목은, 푸르른 수목과 양탄자처럼 깨끗한 잔디로 단장되어 있었다.
기분 좋은 풀향기가 흙내음에 섞여 바람에 실려오고, 적당한 때에 나는 잡념을 잊을 수 있었다.
상쾌한 공기가 숨을 가쁘게 하고, 함께한 친구와는 절로 가까워져 힘차게 손을 잡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갔다.
맑은 공기가 숨을 가쁘게 할 무렵, 극장 입구에 다다르니, 아직 이른 시간.
잔디 사이를 거닐며 우리는 풀내음과 이런저런 대화에 한껏 취해 있었다.
관람석에 자리하여 시작을 기다리는 동안, 무의미한 고정자세보다는 무언가 생각을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앞쪽에 좌석을 찾아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일거일동에서 드러나는 성격과 내면을 그려보았다.
그들과 대화해보지 않아도,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행위에서 그들은 자신의 성격과 내면을 거울처럼 내비치고 있었다.
가책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저 나의 내부에서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습관적으로 흔히 일어나는 일들 중 하나일 뿐이고, 내 판단이 100% 맞으리란 보장도 없다.
그러므로 그들의 개인영역을 침범하는 것도 아니다.
듣기 좋은 종소리가 울리자, 주위의 모든 불빛이 사라지고 캄캄한 어둠이 펼쳐지며, 마음은 기대감으로 팽팽히 긴장되었다.
어둠만의 순간이 지나가도록 무거워 보이는 커튼이 무대 위로 천천히 올라가고, 깊숙한 조명 속에 고정된 모습으로 마련되어 있는 자세들.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지며 율동이 시작되었다.
한동안 나는 무대 위의 움직임에 약간의 당혹스러움을 느끼며, 이런 걸 왜 보고 있어야 하는지 의미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지켜보고 있었다.
착 들러붙은 살색옷 덕분에 무대 위의 흐름은 거의 나체들의 향연으로 느껴졌고, 처음 보는 과격해 보이는 율동들은 벌거벗은 몸에 대한 민망함을 점점 더 고조시키고 있었다.
나름대로 그 움직임들을 해석해 보려 노력하고는 있었지만, 그 일은 왜 그리도 어려웠는지.
고전무용에서 볼 수 있는 너울거리는 한복의 아름다운 선과 현란한 색조의 어우러짐도 아니었고, 발레에서 볼 수 있는 부드러우면서도 절제된 직선으로 이어지는 극한의 신체가 이루어내는 우아함도 아니었다.
몸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난 살색 수영복에다, 예술이라고 보기에는 외설적인 모습을 한 나신들이, 일정한 리듬에 맞춰, 크고도 거칠게 이리저리 날고뛰고 하였다.
리듬체조 같기도 하고 육상운동을 연상케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대의 장이 바뀌면서 그 율동들은 언제까지나 나를 먼 거리에 놓아두지는 않았다.
그때까지 적응하기 어려웠던 율동들은 주제를 위한 들러리에 지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막이 올려지고 새로이 무대가 열린 후에도 나는 여전히 조소하는 기분으로 무대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옆자리의 친구가 '슈퍼스타'라고 속삭여 왔고, 나는 비로소 그것이 지금 발표되는 작품의 제목이며 그녀가 기다리던 순간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조금 긴장되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아름답다기보다는 충격적이고, 재미있다기보다는 격정적인, 가슴을 뒤흔드는 팝페라가 시작되었다.
귀에 익은 팝음악 소리가 울려 퍼지자, 기대는 차츰 흥미로 변해갔고, 지금까지의 무대에서 소외당한 듯했던 기분은, 점차 무대 위의 동작과 율동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격한 리듬의 음악과 함께, 힘차고 거센 율동이 몸동작의 마디마디에서 기묘한 전율을 던지고 있었고, 팝 음악의 리듬과 함께 춤추던 내 심장은 환희에 젖어들었다.
살색 또는 하늘색의 파스텔 톤 스타킹에 휩싸인, 옷이라기보다는 껍질에 가까운 복장은, 전신이 표현하는 직선과 곡선의 조화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었다.
예수의 일생과, 인간들의 죄를 대신한 죽음과, 환생을 통한 승리라는 줄거리 자체는, 이미 알고 있는 진부한 이야기라는 이유에서도 그랬고, 특정 종교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에서도, 별다른 관심이나 흥미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나의 모든 감정은 무대 위의 율동들에게로 쏟아져 있었다.
부드럽게 굽어지는 듯, 힘찬 직선으로 드러나는 선의 반항들이, 마치 육신이 전하는 대화인 양, 내 속에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역동의 물결, 육신으로 표현하는 대화, 그에서 오히려 말로 전하는 대사보다 강하고도 흥겨운 감동과 느낌이 전해져 왔다.
내 심장은 무대 위의 움직임에 따라 춤추고 작렬하며, 흥분의 도가니 속을 맴돌고 있었다.
사람의 몸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선의 아름다움과, 율동이 그려내는 리듬의 흥겨움을 순간순간 음미하고 느끼며, 그 속에 녹아들 듯 흥취해 있었다.
건물이 무너질 듯한 박수갈채 소리가 터져 나오며, 무대 위의 커튼이 내려오자, 흥분으로 들끓던 마음은 잠시 당황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장내에 환히 불이 켜지자, 의식은 무대 위에서 쫓겨나듯 좌석으로 되돌아왔다.
멀미라도 하듯 심한 어지러움이 머리를 뒤흔들어댔다.
와중 속에 휩쓸려 좁은 출입구로 밀려 나올 때에는, 씁쓸한 허전함이 혓바닥 위를 감돌아 가슴속을 쓸어내리며, 들떠있던 몸속의 세포 하나하나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