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신념에서 벗어나는 방법
내 얼굴이 나일까?
내 모습이 나일까?
내 영혼의 모습이 나일까?
내 손가락이 나일까?
내 귀가 나일까?
생각하는 내가 나일까, 나를 규정짓는 내가 나일까?
남들이 보는 내가 나일까?
난 참 질문을 달고 살았다.
무엇을 '나'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끝없이 매일같이 물었다.
그리고 과연 나의 귀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에 대한 답변을 하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그 답은 오직 나만 하면 됐었다.
나의 작은 귀, 사랑스러운 귀가 내 것이며
조금 비뚤어진 입모양도 나의 것이다.
19살의 어느 날,
성당에 가서 기도를 했다.
"나를 미워한 나를 용서하게 해 주세요."
이 모든 과정을 거쳐온
내가 너무 사랑스럽고
잘 지나왔다고 안아주고 싶다.
난생처음 어른이 무섭던 그 시기는, 모든 것들을 내 귀로 원인을 돌리던 시기였다.
친구들도 과연 나를 좋아할까? 이런 나를? 선생님은 내 멋대로 산다고 날 싫어하는데. 다들 날 별로 좋아하지 않겠구나. 귀 때문은 아닐까? 정말 별스러운 질문을 다해놓곤 끝없는 땅굴 파기에 들어갔다.
왜곡된 신념, 그릇된 신념 찾기에 몰두해 있었다.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들이 마치 사실인 양 그것만 믿고 바라보며 신념을 삐딱하게 설정해 놓는다. 비뚤어진 것은 기울어지고 넘어지기 마련이다. 마음이 참 비뚤어져있었던 시기였던 걸까. 마음에서 불이 차올랐다. 분노가 솟고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가족에게도 화가 났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의 마음을 과연 알까. 이런 모습을 지닌 내 마음을 과연 100% 알기는 할까.
모든 비합리적인 질문들로 나를 몰아세우고는 거울 앞에서 내게 질문했다.
"나 대신 나를 살아줄 사람은 없을까?"
남들에게 내 생각에 대해 말을 잘 안 하던 그 시기에 외롭게 나에게만 질문했었다. 그 속에 있던 것들을 모조리 털어놓던 것은 일기장이었다. 분노가 차오르면 쓰고, 눈물이 나면 쓰고, 마음이 저릿하면 썼다.
내 마음은 뭘까, 내 존재는 뭘까를 궁금해하며 썼던 일기장에서 내 감정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다음날이 되면 어제의 일기를 읽어보고 감정의 원인을 알게 되고, 생각을 부풀리는 주요 원인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일기를 몇 번이고 쓰니 점점 감정이 털어졌다.
어제는 분명 많이 화났는데, 지금은 괜찮네.
한 달 전에는 이랬구나. 지금은 괜찮네.
지금은 좀 슬프지만, 내일은 또 괜찮아지겠지.
스스로 일기를 쓰며 알아갔다. 내 마음에서 내는 목소리에 집중하고 감정을 다독여주었다. 나 많이 슬프구나. 나 많이 힘들구나. 꽤 아팠구나. 분노에 섞인 내 목소리가 이거구나. 내 감정의 이름들은 이거구나.
그렇게 나의 청소년기에 쌓인 일기장은 7~8개 정도였다.
감정을 찾아가는 일, 매일 내가 겪는 감정에 대해 일기 쓰기는 힘듦의 시기를 잘 극복하게 해 준 마법의 묘약 같은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내가 펜을 잡아서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