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tus Feb 25. 2024

한 귀로 듣고 글로 내뱉기

내면의 아이와 화해하기, 집중하고 글쓰기

나이가 들면 보이던 것이 잘 보이지 않고

들리던 것이 잘 들리지 않는다.


나를 어지럽게 만드는 것에 대하여 이제 그만 보고, 그만 들어도 된다는 자연의 섭리 같은 것이 아닐까.





나의 왼쪽 귀는 오른쪽 귀 들리는 것에 비해 약 20% 밖에 들리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오른쪽 귀 청력이 훨씬 좋아졌다. 왼쪽 귀가 어릴 적부터 들리지 않던 터라, 더 많은 소리를 듣는 것에 대한 궁금증은 없다. 우리네 소음이 충분히 시끄럽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어릴 적 약간의 청력장애는 스스로를 애처롭게 여기고 남들에게 동정을 받고자 하는 어떤 무의식적 포인트에 있었다. 무의식적인 사고의 흐름이라는 것이 나를 스스로 '장애'라는 타이틀의 덫에 걸리게 한다. 아무도 만들지 않고, 오직 나만이 내 수치심의 구조를 만든 것이다.


그러한 구조가 무한의 굴레에 빠지지 않기 위해, 어느 날 나는 잠을 자려고 누워 눈을 감고 신께 빌었다.


"내일이 되면 내 귀는 오른쪽 귀와 똑같은 모습이 되게 해 주세요"


눈물이 베갯잇을 적신 후에야 잠이 들곤 다음 날 어김없이 작은 귀를 만났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나는 성당을 다녔다. 천주교 집안은 아니라, 주 1회 일요일마다 성당에 갔다. 내가 어딘가에 속해있다는 소속감을 느끼고 싶다는 이유였다. 분명 신이 있다곤 생각하는데 그 불분명한 정체에 대한 궁금증증과 왜 날 이렇게 만들었나요? 묻고 싶었다. 청소년 미사 캠프를 간 날, 저녁 미사 시간에 촛불을 켜고 둥그렇게 앉아 모두가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화해하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화해합시다.




나는 그 자리에서 나를 힘들게 했던 어릴 적 아이들과 어린 시절 나를 떠올렸다. 어린 나를 다독여주고 싶었다. 할 말을 똑 부러지게 하던 어린 날의 그 순간에도, 마음속에서는 벌벌 떨던 어린아이의 내가 있었다. 숨죽이고 울던 밤에 내가 있었다. 그 모든 나와 화해하고 싶었다.


그리곤 생각했다. 내 한쪽 귀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바깥세상의 소음에 집중하지 말고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하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지금 꺼내는 나의 목소리와 나의 어린 날에 울부짖던 내 목소리에 집중하고 나와 잘 지내며 살라는 신의 계시인 것 같았다.


납득을 했다. 이해가 됐다. 고민 많던 생각 실마리의 끈이 풀렸다. 그렇게 나는 어린 날의 나와 화해를 했다.


수많은 생각들을 글로 적으며 나를 돌아보던 일기장이 쌓였다. 한 귀로 듣고 글로 내뱉는 연습을 했다.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나의 생각들을 성실히 적는다. 지금도 브런치를 연재하며 또 다시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본다.

이전 08화 남들과 다르다는 건 축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